원주민 선교센타 개관한 초대교회

호주 원주민 품은 불도저 목사, 뉴잉턴(Newington)에서 웰링턴(Wellington)으로

글|김환기, 사진|권순형 | 입력 : 2015/07/27 [09:45]
▲  8월호 표지   ©크리스찬리뷰
 
호주는 5년마다 인구조사를 한다. 2011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한국어 사용 인구는 전국적으로 7만 9,786명으로 발표됐다. 지역적으로 보면 시드니가 있는 NSW주에 57,8%(46,105명)가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호주에서 한국어 사용자가 가장 많은 지역은 스트라스필드(Strathfield)이지만, 인구비율로 보면 뉴잉턴(Newington)이 14.9%로 높다.
 
뉴잉턴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 선수촌으로 개발되었던 지역이다. 올림픽이 끝나고 일반인에게 분양한 후, 남은 인근 지역도 개발하여 지금은 시드니에서 살기 좋은 마을 중 하나가 되었다.
 
뉴잉턴 공립학교는 재학생이 약 8백 명이다. 그 중 한국인이 150여 명이나 된다. 학교는 올림픽 기간 중 선수들을 위한 '의료와 재활센터'였다. 올림픽이 끝나고 학교로 용도를 변경하여 2002년 개교했다.
 
이곳에 '초대교회'가 있다. 전국진 목사가 담임목회자인데 그는 1988년 말 호주로 유학을 왔다. 1991년 초대교회 2대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고 24년째 섬기고 있다. 그는 2004년 10월 12일 예배당을 톱 라이드(Top Ryde)에서 뉴잉턴으로 교회를 이전했다.
 
전 목사는 지난해 1월 원주민 선교를 다녀온 이후 선교에 대한 비전을 구체화하였다. 시드니에서 원주민 선교하는 교회가 많이 있지만, 현지에 원주민 선교 센타를 구입한 교회는 아직까지 없었다.
▲ 초대교회는 웰링턴 지역에 호주 원주민 선교관을 구입하고 지난 6월 개관 감사예배를 가졌다.     © 크리스찬리뷰
 
호주 원주민(Indigenous People)은 누구인가?
 
호주 원주민이란 내륙에 살고 있는 '애버리지니' (Aborigine)와 '토레스해협섬주민'(Torres Strait Islanders)을 말한다. 호주 대륙에 원주민들이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약 4만 년 전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동남아시아를 거쳐 당시 뉴기니(New Guinea)섬 등과 연결된 육로 혹은 티모르(Timor)섬으로부터 해로를 통해 호주 대륙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인종적으로는 아시아 혹은 폴리네시아의 어느 민족과도 연관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호주 대륙에는 다양한 종족의 원주민이 살고 있다. 미국의 인디언이나 뉴질랜드의 마오리는 같은 종족이지만, 호주 원주민들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영국과 '와이탕기 조약'(1840)을 맺은 뉴질랜드의 마오리족이나, 강한 단결력으로 미국의 탄압에 맞서 싸운 미국의 인디언과 달리 조직적인 전투나 협약도 없이 거의 일방적으로 당했다.
 
지금은 종족이 다른 원주민이 만나면 'broken English'로 대화한다. 2011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원주민 전체인구 668,881명 중에 90%는 순수 애버리지니(606,164)이고, 6%는 순수 토레스해협 섬사람(38,138)이고 나머지 4%는 애버리지니와 토레스 섬사람(25,583) 양쪽 모두에 속한다. 2011년 6월 30일 호주 통계청에서 발표한 상기 도표를 보면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다.

 
영국인의 호주 정착
 
산업혁명 후 영국의 도시인구는 폭증하기 시작했다. 산업화의 부작용으로 도시빈민, 실업자, 범죄자, 알코올 중독자, 여성과 아동의 노동력 착취, 환경오염 등의 예상치 못한 많은 사회문제들이 발생하였다. 죄수들이 차고 넘치자, 대안으로 해외에 ‘유형 식민지’(penal colony)를 개척하기로 결정한다.
 
1776년 미국이 독립하면서 죄수들을 더 이상 보낼 수 없게 되자, 1788년 아서 필립(Arthur Philip) 선장이 11척의 배에 7백78명의 죄수(남자 586명, 여자 192명)를 포함한 약 1천500명의 인원을 태우고, 시드니 항구에 입항하여 식민지 건설을 시작하였다.
 
영국인들의 원주민 학살뿐 아니라 함께 온 질병에 대한 저항력이 없던 원주민들은 급격하게 감소되었다. 
 
호주는 1770년 '제임스 쿡' 선장에 의해 호주 동남부지역이 대영제국의 영토로 선포되어 ‘뉴 사우스 웨일즈’(New South Wales)라고 불렸다. 1788년과 1792년 사이에 약 3천546명 남죄수와 7백66명의 여죄수가 시드니 항에 도착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전문직 범죄자’(professional criminals)로서 정착하는데 적합한 기술이 없었다. 많은 사람들이 병들었고, 일하기에 부적절했으며, 심한 노동으로 죽어갔다.
 
1790년에는 음식 문제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게 되어 그해 6월에 도착한 사람들은 1/4이 병들어 죽었다. 1791년부터 상황이 호전되기 시작하였고, 그 후 1793년 2월 16일에 최초로 죄수가 아닌 '자유 정착민' (free settlers)이 도착하였다. 마지막 죄수 호송인 1868년까지 약 16만 명에 달하는 죄수들이 오스트레일리아로 호송되었다. 계속되는 영국인의 유입과는 반대로 원주민은 1788년부터 1900년 사이에 인구의 90%가 감소되었다.

▲ 호주 원주민 팀 에드워드 목사가 웰링턴에서 손주들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 크리스찬리뷰
 
빼앗긴 세대 (Stolen Generation)
 
1910년에서 1970년까지 적어도 10만 명 이상의 원주민 아동들이 부모로부터 강제적으로 분리되어 기독교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고아원이나 백인 가정에 입양되었다. 이렇게 강제 분리되어 양육된 원주민 아이들을 '빼앗긴 세대'(stolen generation)라고 부른다. 
 
몇 년 전 상영되었던 '오스트레일리아'란 영화는 2차대전 중에 펼쳐진 '빼앗긴 세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정부의 잘못된 정책에 맞서는 백인 여주인공과 원주민 아이의 사랑 이야기다. '빼앗긴 세대'에 대한 보고서가 1997년에 처음으로 호주사회에 공식적으로 공개되었을 때 정부는 거센 여론의 압박을 받게 된다. 당시의 수상이었던 존 하워드(John Winston Howard)는 유감(regret)이라는 표현으로 적극적 사과를 하지 않았다.
 
2008년 케빈 러드(Kevin Michael Rudd) 총리는 매년 5월 26일을 ‘National Sorry Day’ 로 정하고,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미래를 향한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이후 원주민에 대한 정부 정책이 우호적으로 바뀌었지만 아직도 차별은 여전하다. 위 도표를 보면 2011년 현재 원주민은 669,881명으로 인구의 3%가 원주민이다. 2014년 4월 30일 정부는 평균 인구증가율이 1.6%인데 비하여 원주민 인구증가율은 2.2%이므로, 이런 추세라면 2026년까지 원주민 인구는 925,000명이 넘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 영국 해군의 군인이자 식민지 행정관으로 유럽의 식민지 최초의 오스트레일리아 제독 아서 필립. 그는 1788년 현재 시드니 시가 되는 장소를 유배지로 선택했던 인물이다.     
 
원주민을 선교하는 원주민
 
지난 6월, 전국진 목사는 올림픽 공원에 있는 식당에서 퍼스에서 온 에드워드 목사와 케언즈에서 온 한스(Hans and Yodie Batzke) 부부를 만났다. 세 사람 모두 원주민이다. 에드워드 목사는 순수 애버리지니, 한스는 독일계 피가 섞인 애버리지니, 예디는 토레스와 애버리지니 혈통을 가지고 있다. 모두가 자신을 원주민이라고 하는데 실제적으로 모두 다른 혈통을 가지고 있다. 에드워드 목사(Rev. Tim Edwards)의 사위인 나단(Nathan)은 토레스 섬사람이다. 그는 뉴카슬(Newcastle)에서 약 2시간 떨어진 템워스(Tamworth)에서 목회하고 있다.
 
에드워드 목사는 퍼스에서 이글락교회(Eagle Rock Community Church)를 담임하고 있다. 원주민 사이에서 덕망이 높은 사람으로, 한인교회와 다방면으로 협력하고 있다. 전 목사는 하태식 목사(시드니예수전도단)를 통하여 에드워드 목사를 알게 되었다. 그가 시드니에 왔다는 것을 알고 함께 만나게 되었다.
 
에드워드 목사는 '원주민 선교관 개관 감사예배'에서 세 명의 설교자 중 한 사람이다.
 
에드워드 목사는 33년 동안 원주민과 다민족 사역을 하고 있다. 케언즈에서 목회하다가 11년 전 퍼스로 선교지를 옮겼다. 한스는 케언즈에 있을 때부터 친구이다. 에드워드 목사는 퍼스에 있는 한인교회들과 협력하여 중국도 다녀왔다. 그는 원주민 선교의 몇 가지 주의사항을 말해 주었다.
 
"한국 사람들은 무조건 원주민에게 가서 선교하고 싶어 하는데, 주의할 것은 가기 전에 먼저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제가 도와 주는 것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선교하는 사람 각자가 원주민의 친구가 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역마다 원주민들은 다른 종족이기 때문에 한곳에서 선교가 잘 된다고, 다른 곳에서도 잘 될 것이라는 착각은 버려야 합니다."
 
"선교는 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가는 것입니다. 첫번째 선교사는 하나님 자신이셨습니다. 범죄하고 도망한 아담과 이브를 찾아 가셨습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소외되고 병든 사람들에게 가셨지, 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선교는 우리를 필요로 하는 곳으로 가는 것입니다."

▲ 웰링턴 시내 입구에 위치하고 있는 원주민 선교관(벧엘관) 전면 입구.     © 크리스찬리뷰
 
어떻게 선교관을 구입했는가?
 
전 목사의 별명은 불도저이다. 그는 하나님의 뜻이라면 이것저것 계산하지 않는다. 누가 뭐라고 해도 불도저같이 밀고 간다. 하나님은 전 목사의 그런 마음을 기뻐하시는 것 같다. 전 목사가 원주민 선교에 처음 눈을 뜬 것은 작년 1월이다. 시드니 YWAM 강사로 활동하면서 원주민 선교에 비전을 갖게 되었다.
 
단기 선교를 갔다가 원주민 마을에 선교관을 구입해야겠다는 뜻을 품었다. 그는 바로 행동으로 들어갔다. 웰링턴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원주민이 살고 있는 '나니마' 마을이 있다. 전 목사는 그곳의 폐교된 학교를 사려고 했다. 원주민 원로회의까지 참석을 했으나 팔지 않는다는 통보를 받았다. 다음 후보지인 더보(Dubbo)에 선교관을 구입하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하나님께서 지금의 선교관을 보여 주셨다. 선교관은 29년 전 주인이 직접 지은 집이다. 자녀도 없고 나이가 들어 '더보 양로원'으로 가야 할 형편이 되었다. 그는 50만 불 받기를 원했다. 전 목사는 편지를 썼다.
 
"당신의 집은 개인 집이 아니라 원주민 선교관으로 사용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형편상 44만 불이면 살 수 있겠습니다."
 
기도하면서 쓴 전 목사의 편지는 주인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얼마 후 '6만 불은 헌금하는 마음으로 팔겠습니다'라는 내용의 편지가 왔다. 그가 남기곤 간 가구만 해도 5만 불이 넘는다고 한다. 바울이 생각이 났다. 2차 전도여행 중 아시아로 가려고 했으나 '성령'이 막았고, 반대편인 비두니아로 가려고 했는데 '예수의 영'이 막아서 바울은 빌립보에 유럽 최초의 교회를 세웠다. 하나님께서는 첫 번째도 아니고, 두 번째도 아닌 지금의 아름다운 선교관을 예비하고 계셨던 것이다.
▲ 선교관 입구 왼쪽의 넓은 공터(2,025㎡)는 교육시설(유치원)을 건축할 예정이다.     ©크리스찬리뷰
 
웰링턴 원주민 선교관 개관 감사예배
 
지난 6월 20일 새벽 6시, 원주민 선교관 개관예배에 참석하기 위해 뉴잉턴 공립학교에서 만났다. 선발대는 어제 출발을 했다. 필자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승합차 한 대가 출발한 상태였다. '연합뉴스' 김기성 특파원도 함께 했다.
 
연합뉴스는 방송과 신문, 정부, 포털 사이트, 기타 예약 구독자에게 기사를 공급하는 뉴스통신사다. 정권의 언론 통폐합 정책의 일환으로 기존의 모든 통신사를 통합하고 흡수하여 1980년 12월 19일 '연합통신'으로 출범하여, 인터넷이 발달되면서 방송과 신문뿐 아니라 포털 사이트까지 기사를 제공하게 되면서, 1998년 12월 19일 '연합뉴스'로 회사명을 변경하였다.
  
차는 새벽 찬 공기를 가르며 '블루 마운틴'을 넘어 월링턴을 향하여 질주하였다. 시드니에서 웰링턴까지는 약 5시간 소요된다. 밖의 온도는 0도, 운해(雲海)는 산을 덮고, 길가에는 죽은 캥거루, 회색 옷을 입은 양, 하늘과 땅이 만나는 끝없는 지평선 등 시드니에서는 볼 수 없는 낯선 풍경들이 계속하여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웰링턴은 한 번도 가본 적은 없지만 낯설지가 않은 곳이다. 오래 전 교환사관으로 있었던 뉴질랜드의 수도와 이름이 같아서 그런 것 같다. 선교관 대지는 6천70 스퀘어이다. 웰링턴 시내로 들어가는 입구에 위치하고 있다. 선교관은 빨간 벽돌로 지은 2층 건물이 입구에 있다. 방이 5개, 주방, 넓은 거실, 오락실 등의 시설이 있다. 뒷마당으로 가면 수영장, 테니스장 그리고 큰 창고가 있다. 창고는 예배당으로 개조하여 사용할 예정이다.
 
청년들의 찬양으로 '원주민 선교관 개관감사예배'의 문을 열었다. 한인 원주민 선교의 새로운 이정표를 찍는 역사적인 날이다.
 
"자체 건물도 없는 초대교회가 어떻게 선교관을 먼저 구입했는지 의아해 하시는 분도 있지만, 오히려 이것이 우리 교회의 자랑거리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립니다."
 
전 목사는 원근 각지에서 참석한 사람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오늘 설교를 맡은 세 분의 목사님은 물론이고, 참석하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특별히 멀리 떨어진 템워스(Tamworth)에서 오신 에드워드 목사님의 사위인 나단 목사님 가족에게도 심심한 감사를 표합니다." 감사예배에는 모두 51명이 참석했다.

▲  원주민 선교관은 6,070㎡ 의 넓은 대지에 수영장, 테니스 코트, 큰 창고가 있으며, 2층 벽돌집에는 5개의 방과 넓은 거실, 오락시설 등이 구비되어 있다.   © 크리스찬리뷰
 
첫 번째 설교를 맡은 에드워드 목사는 '꿈과 축복의 장소'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전 목사는 저를 처음 만났을 때, 원주민 선교에 대한 비전에 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그때 저는 그의 열정에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오늘의 본문 창세기 28장은 벧엘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곳은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곳입니다. 벧엘은 땅과 하늘이 연결된 곳입니다. 벧엘은 축복의 장소입니다. 웰링턴 원주민 선교관이 야곱이 하나님의 비전을 받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벧엘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두 번째 설교는 웰링턴 침례교회를 섬기는 게리 무르(Gary Moore) 목사였다. 무르 목사는 6월 말 아프리카 잠비아로 선교를 떠났다. 그는 웰링턴에서 세계를 품고 목회하는 사람이다.
 
 '세상을 향한 선교'(시편 96편)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그는 웰링턴에서 16년간 사역하면서 장단기로 원주민 선교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런데 이번같이 선교관을 구입하고 본격적으로 사역하는 팀은 처음이라고 했다.
 
"선교란 것은 오늘하고 내일 끝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 오실 때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 선교는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웰링턴에는 1823년 처음 선교가 시작된 후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저는 한국인의 선교를 적극적으로 도울 생각입니다. 일본의 압제를 경험했던 한국인이 원주민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 크리스찬리뷰
 
초대교회 홍사일 집사의 기도와 이지리 자매의 특별찬양이 있은 후, 김종규 목사(시드니영성교회)가 설교했다. 김 목사는 새벽 5시에 집에서 출발하여 뉴잉턴에서 초대교회 미니버스를 타고 왔다.
 
"하나님께서 초대교회를 위하여 대사를 행하셨습니다. 이곳에 원주민 선교관을 개원케 하시고 원주민 선교사역을 하게 하셨으니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시 126:3)
 
"진심으로 축하를 드리며 주께서 대사를 행하셔서 원주민의 영혼을 사랑하시고 원주민 선교관을 개관케 하셨으니 원주민 선교사역에 놀라운 결과가 일어 날 것이라 믿습니다."(시 71:19-20)
 
"이제 초대교회가 대사를 행하시고 대사를 경영하시는 하나님께 선교관 경영과 운영을 맡기면(렘 45:5 잠16:3)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대사를 경영하여 주시고 크고 측량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을 셀 수 없이 행하실 것입니다." (욥 5:8-9)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라(시 126:6)는 말씀대로 원주민 선교의 열매인 아름다운 영혼의 추수단을 거둬들이는 초대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 전국진 목사     © 크리스찬리뷰
 
마지막 순서로 '선교사명 고백문'(mission confession)을 선포하는 시간을 가졌다. 전 목사는 '선교사명' 작성을 위하여 수많은 시간을 하나님과 씨름해야 했다. 단순한 입술의 고백이 아닌, 삶의 실천이 되야 했기 때문이다.
 
1. 우리는 선교하기 전에 먼저 말씀과 기도의 자리에 모여 성령과 복음의 능력 그리고 십자가의 힘과 사랑을 체험한다.
 
2. 우리는 호주 전 지역으로 가서 전하고 제자 삼으라는 부르심에 생명 다해 순종한다.
 
3. 우리는 1세기 초대교회의 고난의 선교 정신을 모본 삼아 세상과 교회에 영향과 충격을 준다.
 
4. 우리는 웰링턴 벧엘관을 시작으로 호주의 다른 지역에 계속해서 벧엘관을 세워간다.
 
5. 우리는 계속해서 성경 선교 준비와 선교 훈련을 실행한다.
 
6. 우리는 이 뜻있는 원주민 선교사역에 겸손과 헌신 그리고 낮아짐과 섬김으로 준비된 일꾼들을 동참시킨다.
▲ 팀 에드워드 목사     © 크리스찬리뷰
  
동전서선 (東傳西宣)
 
전 목사는 4자 성어 만들기를 좋아한다. 설교의 내용도 4자로 요약해서 기억에 남게 한다. 얼마 전 에스겔서 37장의 말씀을 선포한 후, 내용을 요약하여 '에골해군'이라고 했다. '에스겔 골짜기의 해골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니 하나님의 군대가 되었다.' '해골 같은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하나님의 군대가 될 것이다.'
 
그는 이사야 43:19절의 말씀을 근거하여 '광길사강'이란 용어도 만들었다. "내가 새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전 목사는 말씀을 요약하며 '광길사강'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라고 했다. 4자로 요약된 전 목사의 설교를 한 번만 들어도 오랫동안 기억할 수 있을 것같다. 전 목사는 초대교회 성경읽기 캠페인도 4자 성어로 한다. 주보에는 '매삼주오'라는 글귀가 있다. '매일 삼장, 주일 오장 성경을 읽자'라는 뜻이다.
 
선교의 비전도 네 글자로 요약했다. '동전서선'이다. '블루 마운틴 동쪽은 전도하고, 블루 마운틴 서쪽은 선교한다.' 블루 마운틴을 기점으로 '동쪽은 초대교회가 담당하고, 서쪽은 웰링턴 원주민 선교관이 담당할 것'이라는 비전을 제시하였다.
 
전 목사는 웰링턴이 원주민 선교의 시작이지 끝이 아니라고 했다. "저희 교회는 이곳을 베이스 캠프로 삼아 계속하여 내륙으로 전진할 것입니다. 선교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한 지상최대의 사명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 일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 선교센타는 호주뿐 아니라 호주 원주민에 관심을 가진 전 세계 교회에게 개방할 예정입니다.
 
우리는 protestant입니다.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내일을 향해 도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가 하는 한마디 한마디는 힘이 있었고, 영성이 넘쳤다. 도대체 그의 힘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지 궁금했다.

▲ 개관 감사 예배에서 설교자들이 전국진 목사에게 안수기도를 하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기도는 겸손이다

그는 침례교 목사로 강동 중앙침례교회, 부산 영안침례교회을 섬기다 1988년 말에 호주로 유학왔다. 대전침례교신학대학에서 학생회장을 역임했다. 당시 어수선한 시국과 맞물려 많은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작년에 침례교 오세아니아 침례교 회장으로 추천받았지만 고사했다. 지금까지 24년간 초대교회를 기쁨으로 섬기고 있다.
 
그가 성경 다음으로 좋아하는 책은 '엔드류 머레이'가 쓴 '겸손'(humility)이란 책이다. 아마 그의 성품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는 책이 아닌가 생각한다.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는 많은 것들이 있어야 합니다. 리더십도 필요하고, 인간관계도 좋아야 하고, 좋은 프로그램도 있어야 하지요. 하지만 이 모든 것의 기초는 기도입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 아닙니다. 겸손은 기도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초대교회의 자랑이 무엇이냐고 묻자, 그는 조금의 주저 없이 '기도하는 교회'라고 대답했다. 초대교회는 화요일, 수요일, 주일 중보기도 팀이 있다. 디모데전서 2장 1절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의 말씀을 인용하였다.
  
"간구, 기도, 도고는 무엇입니까? 모두 기도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바울이 디모데에게 첫째로 권한 것이라면, 우리도 첫째로 지켜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힘은 기도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초대교회는 겨울방학을 맞아 웰링턴에 있는 원주민 선교관에서 수련회를 갖고 지역 원주민 어린이들과 교제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 크리스찬리뷰
 
예수전도단 PDTS
 
전 목사는 2007년 캐나다 밴쿠버에서 열린 목회자를 위한 PDTS(Pastors Discipleship Training School) 코스에 등록하여 12주간 훈련을 받았다. 훈련을 마치고 8주간 선교여행을 남미로 다녀왔다. 온두라스에 갔을 때 초등학생인 '페트리시아'를 만났다.
 
기도 중 '페트리시아'를 시드니로 데리고 와서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났다. 그는 즉각적으로 행동으로 옮겼다. 아들이 다녔던 학교에 편지를 쓰고 교장을 만나서 '왜 아이를 데리고 와야 하는지', '왜 아이가 교육을 받아야 하는지' 등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하고 학교측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얼마 후 편지가 왔다. 6년 전액 장학생으로 받아주고, '홈 스테이'도 알선해 주겠다고 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교장 선생님의 마음을 감동시켰던 것입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전 목사는 아직도 그때의 감동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아직 남아 있었다. 초청 절차, 비행기, 보험, 생활비 등 약 1만 3천 불이 필요했다. 이 문제를 교인들에게 이야기를 했을 때, 모두가 기쁨으로 헌금하여 쉽게 해결되었다. '페트리시아'는 시드니에서 6년간 하이스쿨을 마치고 지금은 한동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인생의 하이라이트가 언제냐고 물었다. 전 목사는 "바로 지금이 아니겠습니까!"라는 뜻밖의 대답을 했다. 그의 말에 100% 공감하며 나는 이렇게 화답했다.
 
'But the best is yet to come' 이번에는 전 목사가 내 말에 공감했다. 그렇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우리 인생의 하이라이트가 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the best는 아직 오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그가 선물로 준 겸손(humility)을 읽어 보았다. 책 표지에 겸손의 정의가 있다.
 
'겸손, 성결로 가는 여정'(Humility, the Journey toward Holiness) 성결은 '하나님의 성품'이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여정이 바로 겸손이다.〠  

글/김환기|크리스찬리뷰 영문편집인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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