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짐의 길목에 서서

한마디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0/03/08 [09:59]

해외 목회 초년병 시절, 그야말로 아무것도 모르면서 시작한 것이 선원선교였다.

그저 쪽 복음 몇 권 들고 정박해 있는 배에 올라가 전도지를 나눠주고 다행히 말을 걸어주면 고맙고 그렇지 않으면 다시 미션센타로 돌아와 그들이 방문해 주기를 기다리는, 지금 보면 극히 전 근대적인 방법으로 전도를 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중 많은 선원들과 친분이 쌓여가고 어느덧 그들이 다시 항구로 돌아올 때를 달력에 표시하며 기다리는 내 자신을 보며 흐뭇해 하던 때가 있었다. 그런 선원들의 배를 방문해 식사를 하거나 집으로 초대해 식사를 대접하며 함께 기도하고 예배하며 복음 안에서 교제를 한 게 이민목회의 시발점이었다.

그날도 늘 부둣가에서 손을 흔들며 떠나는 배를 배웅하려는데 아는 기관장이 쓸쓸하게 이런 고백을 했다. “이별은 아무리 연습을 해도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요즘은 이 기관장의 말이 더욱 생각난다. 지금도 나는 목회를 하면서 끊임없이 이별과 만남을 되풀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라고 일어난 일들에 집중하며 할 수만 있으면 이별의 횟수를 줄여 보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역부족이다.

아직도 목회가 미숙한 탓이리라. 그러면서 왜 이별이 익숙해지지 않는 것일까라기보다는 왜 우리는 헤어져야만 하는가에 좀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곳 시드니에는 나보다 더 영적으로 훌륭한 많은 목회자들도 있고, 배움이나 인격으로 감히 넘볼 수 없는 좋으신 분들이 많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께서 저들을 나에게 보내 주셨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한 분 한 분을 이 공식에 대입해 가며 답을 써내려 가고 있을 때 나는 부끄럽고 창피한 내 자신을 발견하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 동안 그분들이 왜 나와 함께 있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그 답이 분명치 않았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여지는, 외형적인 면에 치중하고 있는 내 자신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시간이기도 했고 어찌 보면 나와 함께하고 있는, 그리고 떠나간 분들에 대한 죄스러움을 고백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저 있으니까 내 양이고, 갔으니까 그만이라는 철두철미한 직업 정신에 입각한 목회에 예수님의 심장은 없었던 것이다. 있었다면 해야만 하는 의무감이 마치 내가 사명감에 충실한 것처럼 보여졌을 뿐이고, 비를 맞고 있는 그들에게 나는 우산을 쓰라고만 했지 같이 비를 맞을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헤어짐을 고통스럽고 괴로워하기 이전에 지금 나와 함께 하고 있는 이 성도들이 나와 함께 해야만 하는 당위성과 정당성이 완전하지 않는 한, 많은 교회들과 목회자들을 제쳐두고 그들이 나와 함께 해야만 하는 이유가 확실하지 않는 한, 아니 내가 그 답을 찾지 못하는 한, 또 다른 이별은 이미 준비된 것이고, 우리 모두는 새로운 상처를 안고 신음하며 가야 하는 불쌍한 순례자들일 것이다.

이젠 이 지긋지긋한 이별을 이쯤에서 멈추었으면 좋겠다. 내양을 먹이고, 내양을 치라는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다시 한 번 깊게 묵상해 본다.〠

 

글/김종열
에쉬필드한인장로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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