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 커를 선교사의 생가와 무덤을 찾아서
휴 커를 선교사의 여권과 죽음
 
글|김석원, 사진|권순형
▲ 한국(부산)에 파송된 초기 호주 선교사와 자녀들. 뒷줄 왼쪽부터 데이비드 라이얼, 엘리자베스 베시 무어, 제임스 노블 맥켄지, 엘리스 니븐, 휴 커를, 클라라 엥겔, 겔슨 엥겔, 앤드류 아담슨, 카밀라 아담슨, 에델 커를 선교사와 자녀들 (1910년 3월 부산)   


지난달 본지 커버스토리로 보도된 호주 최초의 의료 선교사 휴 커를 선교사(Dr. Hugh Currell, 한국명 거열휴)의 멜본 생가와 묘지를 7월 6일부터 8일까지 2박 3일 일정으로 찾았다.
 
박스힐 공동묘지(Box Hill Cemetery)에 잠들고 있는 커를 선교사(1871. 2.8~1943. 3.10)의 무덤은 가족 묘원으로 휴 커를 선교사와 부인 루시 에델, 아들 휴 다니엘, 두 딸 에델과 프랜시스, 그리고 쥬디스(에델의 딸)와 피오나(프랜시스의 딸) 등이 묻혀있다. 
 
▲ 휴 커를 선교사가 한국 사역을 마치고 1915년 호주로 돌아와 병원을 개원하고 생활했던 주택.     © 크리스찬리뷰
▲ 주택 정면     © 크리스찬리뷰

휴 커를 선교사의 외손자 기드온 루더포드(Gideon Rutherford) 씨에 의하면 할아버지는 한국에서의 사역(1902-1915)을 마치고 호주로 돌아와 1915년부터 멜본 시내 인근에 있는 켄싱톤(Kensington) 지역의 주택에서 병원 개업을 하고 세 자녀(에델, 프랜시스, 휴 다니엘)들과 함께 이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사위였던 자신의 아버지는 1930-40년 경에 할아버지로부터 병원을 인수받아 1973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곳에서 프랜시스 가족들이 함께 살았다고 전했다. 그러나 현재 이곳에는 아무도 살지 않고 있으며, 자물통으로 문이 굳게 채워져 있었다.   
 
▲ 휴 커를과 루시가 손자 돈과 함께 정원에서(1938년).     
 
휴 커를 선교사 사망 신문 기사
 
지난 3월 10일 수요일 커를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교회는 헌신적인 성도이자  참다운 선교정신으로 일했던 해외 선교사를 잃어버렸다.
 
휴 커를은 1871년 북아일랜드에서  태어나 20세기 초 호주로 왔다. 그는 자신을 드려 그리스도와 한국에 있는 주님의 교회에 드리기로 작정하고, 의료선교사로 임명받아 그곳으로 향했다.
 
그는 아내 커를 여사와 함께 1902년 한국에 상륙했고, 잠시 동안 부산에서 지냈다. 그러나 그가 한국에서 했던 가장 큰 사역은 주로 진주에서 이뤄졌다. 이 사역은 커를 선교사에게도 큰 모험이었지만, 특히 그의 아내와 어린 두 딸들은 육로로 오랜 여행을 감수해야 했고, 이들은 새로운 지역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커를 여사는 당시 진주에 거주한 첫번째 백인 여성이었다.

▲ 멜본 박스힐(Box Hill) 공동묘지에 묻혀있는 휴 커를 선교사 가족묘지. 휴 커를 선교사는 1871년 2월 8일 북아일랜드에서 태어나 1943년 3월 10일 72세의 나이로 멜본에서 사망했다. 이곳에는 휴 커를 선교사와 부인 루시, 아들 휴 다니엘, 두 딸 에델과 프랜시스 그리고 쥬디스(에델의 딸), 피오나(프랜시스의 딸) 등이 묻혀 있다.     © 크리스찬리뷰

이들의 집은 일반적인 서구가정에서 기대할 수 있는 편리함과는 전혀 상관없는 평범한 한국 가옥이었다. 이들은 한국에 거주하는 동안 그 집에서 머물렀다.
 
오랫동안 커를 선교사는 목회자, 방문 전도자,  매서인 관리책임자(당시 성경과 신앙서적을 팔러 돌아다니며 전도도 했던 사람들을 매서인이라고 부름 역주), 그리고 지역 선교사들의 대표로서 활동했다. 물론 이 모든 일들은 그의 주업이었던 의사 직분에 더해진 것이었다.
 
그는 매우 열악한 시설 속에서도 절름발이들을 치료하고, 종종 장님, 나병 환자 등 뿐만 아니라 시간이 갈수록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돌봐야 했다.

▲ 지역 신문에 실린 휴 커를 선교사 사망 관련 기사.   © 크리스찬리뷰
 
▲ 커를 선교사 묘비에는 한국(진주)에서 태어나 1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아들 휴 다니엘을 추모하며 "그는 이곳에 없다, 그는 부활했다."라는 문구를 비문에 새겨 놓았다.     © 크리스찬리뷰

그는 선교기지와 병원 그리고 선교사 숙소 자리를 물색하고 계획하는데도 식견을  보여주었다. 그가 병원 건물(배돈병원)을 짓는 과정에서 일본인 건설업자 사이에 일어났던 일화가 있다. 업자가 (공사중) 부도를 맞아 처리를 해야 했을 뿐 아니라, 끔찍한 화재로 인해 나머지 건물 하나도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그러나 커를 선교사는 거기에 굴하지 않고 사람들을 위해 의료사역에 온 힘을 기울였다.
 
▲ 배돈병원 전경(진주)    
▲ 휴 커를 선교사 여권     © 크리스찬리뷰
▲ 휴 커를 선교사가 의사 사위와 병원을 동업하며 체결한 계약서     © 크리스찬리뷰

단독 공개  ‘커를 선교사 여권’   
 
기드온 루더포드 씨는 지난해 10월 25일 할아버지 가 세운 진주교회 설립 110주년 기념예배에 참석하여 여러 자료들을 기증한 바 있다. 이중에는 휴 커를 선교사의 여권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 여권은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는 귀한 사료로 평가된다.
 
▲ 휴 커를 선교사의 여권에는 부인 루시와 세 자녀의 이름과 나이, 성별이 기록되어 있다.     © 크리스찬리뷰

북아일랜드 출신이자 그곳에서 교육을 받은 커를 선교사는 1899년 호주로 이주해 왔고, 호주인 의사로는 처음으로 1902년 한국 부산 땅을 밟았다. 루더포드 씨가 진주교회에 기증한 할아버지의 여권은 한국 사역을 시작한 지 13년이 지난 후 귀국을 앞두고 1915년에 발급 받은 것이다. 
 
여권 발급 일자는 1906년 시원학교와 1913년 배돈병원을 지은 뒤의 시점으로, 이들 부부가 진주에서의 사역이 한참 무르익고 있을 무렵에 발급받은 여권으로 보인다.
 
1940년까지 호주 정부는 독립적으로 외교관을 해외에 파견한 적이 없었고, 런던에 있는 대영제국 외교부를 통해서 외교사무를 처리했다. 이 여권도 지금의 서울인 당시 경성에 있는 영국 영사관을 통해 발급된 것으로, 영국인와 영국제국 내 모든 국민들에게 발급된 증명서이기도 하다. 

▲ 여권에 사진과 서명이 있는 부분.     © 크리스찬리뷰
▲ 일본에서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휴 커를 선교사 사진     © 크리스찬리뷰
 
여권 내용은 커를 선교사 부부의 사진이 붙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얼굴형, 눈모양, 키까지도 자세하게 기록되어있다. 여기에 따르면 커를 선교사는 약 168cm 정도의 키에 넓고 긴 이마와 파란 눈과 밝은 고동색 머리색깔을 가진  동그란 얼굴의 소유자였으며, 부인인 커를 여사도 남편과 거의 같은 키와 분위기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나온다.
 
이 여권을 통해 당시 좁은 한국 가옥의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진주 주민들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44세와 34세의 젊은 의료 선교사 부부의 헌신이 더욱 생생하게 그려진다. 〠

글/김석원|크리스찬리뷰 편집부장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copyright ⓒ 크리스찬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입력: 2016/07/25 [14:36]  최종편집: ⓒ christianreview
 
 
포토 포토 포토
만남과 이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