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5-11)

정지홍/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2/05/30 [11:16]

사랑은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증명해야 한다. 얼마나 사랑하는지, 얼마나 많이 사랑하고 있는지 몸으로 삶으로 증명할 수 있어야 참된 사랑이다. 하나님도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친히 증명해 주셨다.

 

우리가 연약할 때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부어졌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롬 5:6). 우리말 ‘연약하다’로 번역된 헬라어는 ‘아스데네스’(asdenes)인데 “무력하고 무능하고 그래서 비천한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을 뜻한다.

 

구원에 관한한 인간은 아무런 기여를 할 수 없는 무력하고 무능한 존재다. 그래서 인간 스스로는 결코 천국에 닿을 수 없는 비천한 존재다. 이런 의미가 ‘아스데네스, 연약함’이다. 그런데 그 연약한 존재가 경건하지도 않았다.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도 않았고, 경건이나 거룩하고는 담을 쌓았다. 정말 최악이다. 이런 자들이라면 아무리 하나님이라고 해도 상대하고 싶지 않을 것 같다. 연약해도, 경건해야 눈길이 갈텐데, 경건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 연약한 때에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 무능하고 비천한 때에 게다가 경건하지도 않은 자들을 위하여 주님이 죽으셨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정말 어이없는 죽음이다. 대신 죽어줄 가치가 전혀 없는 자들을 위해 주님이 죽으셨기 때문이다.

 

이게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이야기다. 우리가 무능하고, 우리가 비천하고, 우리가 경건하지 않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 순전히 우리를 위해 주님이 그 어이 없는 죽음을 당하셨다.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

 

목숨은 누구에게나 하나 뿐이다. 다른 사람에게 주고나면 나에게 없는 것이 목숨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목숨이다. 때문에 그토록 소중한 목숨을 걸고 누군가를 위해 대신 죽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누군가가 의인이라고 해도.

 

그런데 죄인이라면 어떨까? 대신 죽어야 할 대상이 의인도 아니고 선인도 아닌 죄인이라면 어떨까? 과연 죄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있을까? 죄인을 위하여 용감히 나설 자가 있을까? 의인을 위하여 죽는 것도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죽는 것도 드물기만 한데 죄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있을 수 있을까?

 

게다가 여기서 말하는 ‘죄인’은 가벼운 죄, 1회성 죄를 지은 죄인이 아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죄인이다. 그래서 마땅히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요, 사형 선고를 받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죄인이다.

 

그 죄인이 우리다. 우리는 의인이 아니라 심판의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죄인이다. 아무리 극한 상황이 와도 용감히 목숨을 던질 이유가 전혀 없는 죄인이 바로 우리다. 그런데 그런 우리를 위해 주님이 죽으셨다. 죄인된 우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7-8).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까지 되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롬 5:10).

 

‘원수 되었을 때’는 아주 심각하다. ‘연약할 때’나 ‘죄인되었을 때’는 내가 연약한 것이고, 내가 죄를 지은 것이다. 우리 스스로가 처한 상태다. 즉, 하나님과는 무관하게 인간이 홀로 처한 상태가 연약하고 죄인된 상태다.

 

하지만 “원수 되었을 때”는 다르다. ‘원수’가 무엇인가? ‘대적자’다. 그래서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대적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대적자가 되었을 때”라는 의미다.

 

성경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탄이나 마귀를 표현할 때도 ‘원수’로 기록하고 있다. 즉, 인간은 사탄의 자리에 서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원수’로까지 전락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원수가 누구인가?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우리가, 내가 하나님을 대적한 것이다.

 

우리는 ‘연약할 때’로 시작해서 ‘죄인되었을 때’를 거쳐, 마침내 ‘원수되었을 때’까지 이르게 되었다. 갈수록 상황이 나빠지기만 한다. 더욱이 원수는 무너뜨리고 제거해야 할 대상이지, 사랑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원수는 진노하고 징벌해야 할 대상이지 결코 대신 죽어주고 그럴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우리가 사탄의 자리에 서서, 하나님을 대적하던 그때에, 주님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 하나님은 원수까지도 사랑하신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은 당신의 사랑을 우리에게 부으셨고 확증하셨다.

 

하나님의 딜레마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착각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에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많이 사랑해야 하나님도 우리를 많이 사랑하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덜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도 그 크기가 줄어든다고 생각한다.

 

또 우리가 성공하고 잘 나가고 부자가 되면 하나님이 더 사랑하시고, 우리가 병들고 실패하고 가난해지면 하나님이 덜 사랑하시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상관이 없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형편과 비례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하고 또 조건 없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사랑하셨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는커녕, 아직도 죄 짓고 살아갈 때 우리를 사랑하셨다. 우리가 경건치 못하고 연약할 때,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되었을 때조차,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결국 죄인을 사랑하신 것이다. 그런데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이것이 하나님의 딜레마였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기에 죄인은 심판을 받고 죽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법인데, 하나님은 그 죄인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죄를 모른척 하실 수도 없었고, 사랑하는 죄인을 죽게 내버려두실 수도 없었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깊은 고민이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택하신 방법이 자기 희생이었다. 예수님에게 우리의 죄값을 치르게 하시고 예수님을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하신 것이다. 우리에게는 손톱만큼도 해가 없도록 하시고 우리가 당해야 할 죄의 벌을 예수님에게 몽땅 덮어 씌우셨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방법이다.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다.

 

날마다 확증하고 계신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에서 “확증하셨느니라”의 헬라어 동사가 현재 시제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2천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단 한번 확증하신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고 계시고, 내일도 그리고 영원토록 확증해 가신다.

 

남녀 간의 사랑도 확인을 한다. 10년 20년 된 부부 지간에도 사랑을 확인한다. 그런데 하나님도 자기의 사랑을 확인하신다. ‘내가 날마다 너희를 사랑한다. 과거에만 사랑했던 것이 아니라 오늘도 너희를 사랑하고 내일도 너희를 사랑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영원토록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듯, 오늘도 내일도 날마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고 계신다.

 

우리는 두 가지 분명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첫째 하나님이 사랑하시지 못할 사람은 없다. 또 하나님이 사랑하시지 못할 때도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경건치 못하고 연약할 때도 사랑하시고, 우리가 죄인되었을 때에도 사랑하시고, 우리가 하나님께 원수되었을 때조차 사랑하신다. 정말 하나님이 사랑하시지 못할 사람, 사랑하시지 못할 때가 없다.

 

둘째,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고 언제나 동일하시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신실하게 믿고 있는지는 하나님의 사랑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반대로 우리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 얼마나 하나님께 반역을 했는지도 상관이 없다. 하나님은 우리의 형편과 상관없이 우리를 완전무결하게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경건하지도 않고 연약한 우리를, 하나님이 사랑해주셨다. 아직도 죄를 짓고 있는 우리를, 하나님은 사랑해 주셨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원수된 우리를, 하나님은 여전히 사랑해 주셨다.

 

그리고 그 사랑을 확증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셨다. 그 완전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안에서 영원토록 즐거워하기를 바란다. 샬롬!〠

 

정지홍|좋은씨앗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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