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제24대 총독을 역임한 필립 마이클 제프리 (Philip Michael Jeffery)

글/정지수 사진/권순형 | 입력 : 2023/08/28 [12:13]

▲ 서호주에서 출생한 필립 마이클 제프리는 제24대 호주 연방 총독을 역임했다. ©Wikimedia     

 

이번 호에서는 호주 제24대 총독을 역임한 필립 마이클 제프리(Philip Michael Jeffery)를 소개한다.

 

제프리는 1937년 서호주(Western Australia)의 탄광 마을인 윌루나(Wiluna)에서 태어났다. 그는 캐닝톤(Cannington) 주립학교와 이스트 빅토리아 파크 (East Victoria Park) 주립초등학교를 다녔으며 켄트 스트리트(Kent Street)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호주에서 태어나고 교육 받은 제프리는 어렸을 때부터 군인이 되고 싶어 했다. 그래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던트룬(Duntroon)에 있는 왕립 군사 대학에 입학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16세였다.

 

왕립 군사 대학을 졸업한 후 그는 퍼스(Perth)에 주둔한 17 국립 서비스 훈련 중대 및 특수 공군 연대(SASR)에서 군복무를 시작했다. 군인이 되어 국가에 봉사하겠다는 꿈을 이룬 그는 최선을 다해 군 생활을 했다.

 

그가 25살이 된 1962년 그는 군 작전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말라야(Malaya)에 배치되었다. 그는 호주 연대의 제2대대 및 제3대대에 속해 작전을 펼쳤다. 처음으로 해외 근무를 하게 된 제프리는 낯선 환경에서도 최선을 다해 군복무에 임했고 그의 상관들은 그의 근무 태도를 칭찬했다.

 

많은 사람들이 제프리가 앞으로 위대한 군인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다. 말라야 임무를 잘 마친 제프리는 1965년에 군사 작전을 위해 인도네시아의 보르네오(Borneo)로 파견되었다.

 

▲ 시드니에서 열린 예비군의 날 행진에 참석한 마이클 제프리 총독. ©Photo by Leading Seaman Bill Louy     

 

해외에서의 모든 군사작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그는 퍼스(Perth)에 주둔하고 있었던 특수 공군 연대 (SASR)로 돌아왔다. 해외 파병에서 돌아온 제프리는 휴식을 취했다.

 

하지만 그의 휴식은 그리 길지 않았다. 1966년에 다시 해외 파송을 명령 받았다. 이번에는 태평양 제도 연대 제1대대에 속해 파푸아뉴기니(PNG)에서 복무하게 되었다. 파푸아뉴기니는 무덥고 낯선 땅이었지만, 그는 충실히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했다.

 

한편, 해외 근무 기간 동안 그는 말리나 커(Marlena Kerr)를 만나 결혼했다. 그의 아내인 말리나는 시드니 맨리(Manly) 출신으로 남편을 잘 내조했다. 아내의 내조로 제프리는 더욱더 안정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에 충실할 수 있게 되었다. 두 사람은 세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을 낳아 키웠다.

 

파푸아뉴기니(PNG)에서의 복무를 마치고 그는 호주로 돌아왔다가 다시 베트남 전쟁에 파병되었다. 베트남 파병 당시 그는 호주왕립연대 제8대대 보병중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탁월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성했고, 그 결과로 군십자가 훈장과 남베트남 용맹십자훈장을 받았다.

 

▲ 2006년 3월 멜번 영연방 게임을 위해 호주를 방문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오른쪽 2번째)과 마이클 제프리 호주 총독(오른쪽). ©Wikimedia     

 

베트남 전쟁에서 돌아온 그는 더 탁월한 장교가 되기 위해서 학업에 전념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1972년에 영국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해 군사 관련 공부를 시작했다.

 

모든 학업을 마친 후 그는 중령으로 승진되었다. 중령으로 승진한 그는 파푸아뉴기니(PNG)에 위치한 태평양 제도 연대 제2대대를 지휘하게 되었다. 그는 4년 동안 모든 임무를 탁월하게 수행했다.

 

모든 임무를 마치고 그는 1976년에 다시 호주 퍼스(Perth)로 돌아와 육군 특수작전부대의 첫 번째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그는 대령으로 승진했고, 그의 부대를 잘 이끌었다. 해외 파병 경험과 영국 사관학교에서 받은 교육은 그에게 보이지 않는 큰 자산이 되었고, 그를 위대한 장교로 만들어 주었다.

 

그는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했으며 그가 맡은 임무를 탁월하게 수행했다. 그와 함께 근무한 군인들은 그를 잘 따랐으며, 그를 존경했다. 이러한 제프리의 탁월한 리더십은 호주 정부로부터 인정받았다. 호주 정부는 그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제프리는 1981년 호주 대테러 부대의 여단장으로 승진해 2년 동안 부대를 통솔했다. 그 이후 그는 시드니에 위치한 제1기계화 및 공수 여단의 사령관으로 배치되었다. 1985년에는 런던 왕립국방대학에 입학해 군사학에 관련된 공부를 했다.

 

▲ 마이클 제프리 총독과 그의 부인 말레나 제프리.     

 

1986년 그는 소장으로 승진했고, 육군 1만 5,000명 규모의 1사단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사단 병력을 지휘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제프리는 그가 맡은 1사단을 잘 지휘했으며, 1사단의 모든 군인들이 탁월한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도왔다.

 

그 결과 1사단은 호주에서 가장 모범이 될 만한 사단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호주 정부는 그가 1사단을 잘 지휘하고 이끌어 가는 것을 보고 그의 리더십을 높이 평가했다. 호주 정부는 1988년 6월에 그에게 또 다른 훈장을 수여했다. 1989년에 그는 군 참모차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인 1990년에 그는 6만 5,000명의 군대의 일상적인 운영을 책임지는 참모부 부사령관이 되었다.

 

탁월한 리더십을 가진 제프리에게 더 많은 임무와 책임이 맡겨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 있다.

 

1991년 2월에 그는 모든 육군 장비 조달 및 건물 건설 프로젝트의 개발 및 관리를 담당하는 부서의 참모차장으로 임명되었다.

 

1993년 11월 1일, 그는 서호주(Western Australia)의 제27대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2000년까지 서호주 총독으로 근무했다.

 

▲ 캔버라의 안작(ANZAC)기념 예배당에서 마이클 제프리 총독의 운구 행렬. ©Elesa Kurtz     

 

이후 제프리 장군은 3년 동안 퍼스(Perth)에 기반을 둔 비영리 공공 정책 싱크탱크인 퓨쳐 다이렉션 인터네셔널 (Future Directions International)의 창립 회장을 역임했다.

 

이 단체에서 그가 주로 담당한 분야는 청소년, 교육, 환경, 국가 안보 분야였다.

 

한편, 비영리단체에서 일을 하던 제프리는 다시 한 번 국가의 부름을 받게 되었다. 제프리가 호주 연방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2003년 8월 11일 캔버라 국회의사당에서 호주의 제24대 연방총독으로 취임했다. 한편, 영국 여왕은 제프리를 정의의 기사로 임명했다. 그는 호주 총독으로 충실히 임무를 수행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그는 성공회(Anglican Church)의 교인이었으며 신앙심도 매우 깊었다. 그에게는 세 명의 자녀가 있었고, 손주들도 일곱 명이나 되었다. 그는 음악 듣기를 좋아했고, 틈만 나면 독서를 했다.

 

스포츠로는 골프와 낚시를 즐겨했다. 군인으로서 또한 총독으로서 국가에 대한 의무를 충실히 마치고 그는 2020년에 83세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났다.

 

제프리 장군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충실히 감당한 기독교인으로 좋은 본을 보였다. 자신의 삶을 충성스럽게 산 제프리 장군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정지수 본지 영문편집위원, 캄보디아 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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