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기덕 회장의 역경과 기도

글/주경식 사진/권순형 | 입력 : 2023/12/22 [12:29]

▲ 한화는 호주 국방부와 약 3.2조 원 규모의 레드백 129대를 공급하는 수출 계약을 체결했다. 사진은 한화에어로스페이스의 레드백 홍보 영상 캡쳐.     

 

드디어 레드백 장갑차 호주와 계약 체결

 

3조 1,500억원(24억 달러) 규모의 한화 ‘레드백’ 장갑차 호주로의 수출 계약이 2023년 12월 8일 공식적으로 체결되었다.  

  

호주 육군은 기존 사용하던 미국의 M113 장갑차가 노후화되면서 신규 장갑차로 교체하는 사업을 계획했다. 

  

2018년 8월 호주 국방부는 신규 장갑차 사업으로 입찰 제안 요청을 오픈 공포하고 이에 대한민국의 한화 디펜스가 입찰한지 5년 만에 이루어 낸 결실이다. 

  

호주 국방부 소식지는 지난 12월 8일 한화 에어로 스페이스의 호주 현지 법인인 한화 디펜스 오스트레일리아(HDA, Hanwah Defence Australia)와 호주 정부, 획득관리단(CASG) 간 레드백 수출계약이 체결됐다고 공식 발표했다.

  

“The Albanese Government has signed contracts with Hanwha Defense Australia to deliver and support 129 locally built Redback infantry fighting vehicles for the Australian Army (호주 알바니즈 정부는 한화 디펜스와 호주 육군용으로 현지 제작된 ‘레드백(Redback)’ 보병 전투차량 129대를 납품 지원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www.minister.defence.gov.au/media-releases/2023-12-08/contracts-signed-infantry-fighting-vehicles 

  

한국 방위산업 역사상 가장 큰 대규모의 사업을 수주하는 쾌거를 이루어 낸 것이다. 2021년 한화의 K9 자주포 수출에 이어 2023년 ‘레드백’ 장갑차 수출까지 한화가 호주로 무기를 수출하게 된 것이다. 

  

한국 방위산업의 호주 시장으로의 수출은 여러 가지 면에서 큰 의의가 있다. 먼저 이번 호주 시장 진출은 세계 굴지의 글로벌 탑티어 방산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이겼다는 데 큰 의의가 있다. 

  

▲ 한국의 한화 에어로스페이스와 호주 국방부을 처음 연결한 GDI 에이전시 대표 조기덕 회장. 그가 호주에서 방산 중개 비즈니스를 하지 않았다면 이번 쾌거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크리스찬리뷰     

 

이번 레드백 장갑차 수출은 미국, 영국, 스웨덴, 독일등 세계에서 내노라 하는 방위산업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승리한 것이다. 두 번째는 그동안 한국 방산이 수출한 나라들은 대부분 동남아시아의 개발도상국이 자리했다면 이번 수출은 호주 선진국에 한국 방산이 인정받게 되었다는 데 의의가 있는 것이다.

  

그만큼 한국 방산 기술의 발전을 세계시장이 인정하게 된 것이다. 이번 호주와의 계약을 통해 영국, 미국을 포함한 세계 선진국들도 한국 방산산업을 눈여겨 보게 되는 계기가 될 것으로 전망한다. 

  

특히 방산 산업분야에서 전통적으로 강한 독일과의 최종 경쟁에서 승리하게 되었다는 것은 대한민국 무기체계의 우수성을 드러낸 쾌거이기 때문에 더욱 더 큰 의의가 있다. 

  

이렇게 최종 계약이 체결되기까지는 여러 가지 어려운 고비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고비들을 넘기고 호주정부가 한국과 최종 계약을 체결하기까지는 한화의 적극적인 도전정신과 기술력 그리고 한국정부 특히 국방부의 헌신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쾌거에는 안보이는 숨은 애국자가 한 사람 더 있다. 

  

바로 GDI(Global Defence Industries Pty Ltd)의 조기덕 회장이다. 

  

GDI 조기덕 회장

  

조기덕 회장(88)은 고스포드(Gosford)에 살고 있다. 지난 7월 27일 호주 국방부가 한화의 레드백을 우선협상 대상자로 선정한 후 얼마 지나지 않은 8월 4일 조 회장을 고스포드에 있는 한 레스토랑에서 만났다. 

  

그때 인터뷰를 하려고 했지만 조 회장은 우선 협상 대상자가 되었어도 정식으로 계약을 체결하기 전까지는 인터뷰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 고사하는 바람에 인터뷰를 연기했다. 그도 그럴것이, 지난날 우선협상 대상자가 되었지만 호주 정부의 정책 변경으로 실제 계약이 백지화되었던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식계약을 체결 한 후 지난 12월 18일 고스포드 그의 자택에서 공식 인터뷰를 가졌다. 

  

그는 GDI(Global Defence Industries) 에이전시 대표이다. 그가 바로 대한민국의 한화 에어로스페이스와 호주 국방부를 처음 연결한 중개인이다. 그가 호주에서 방산 중개 비즈니스를 하지 않았다면 이번 쾌거는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원래 그는 방산 중개 비즈니스와는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표현하자면 우연 같은데 나중에 보니 하나님께서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인도해 오셨다고 고백한다. 

  

“지나고 보니 제 뜻대로 된 것이 아닌데 결과적으로 보니 하나님께서 이렇게 인도하셨더라고요”

  

그는 7남매의 6번째로 함경북도 웅기읍 백학동에서 태어나 자랐다. 해방을 맞았지만, 해방 후 김일성이 소련 공산당과 함께 북한에 들어오게 된다. 

  

▲ 조기덕 회장 자택 2층 작은 방 하나를 가득 채우고 있는 각종 상패와 기념품들. ©크리스찬리뷰    

 

▲ 조기덕 회장은 서울대 토목공학과를 졸업하고 1960년 공군 장교로 입대해서 군 생활 가운데 많은 토목공사를 감독했다.©크리스찬리뷰     

 

당시 조만식 선생이 창당한 조선 민주당 웅기지부였던 관계로 숙청 대상이 된 아버지는 소련군에 의해 호송되는 도중 도망치려고 달리는 짚차에서 뛰어내리다 부상을 당해 56세의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는 1947년 둘째 형과 함께 월남을 하였다. 

  

“북한에서 월남 한 후 남산 기슭의 해방촌에서 살았습니다. 당시 남산 밑에 해방촌이 있었는데 북한에서 자유를 찾아 월남한 사람들이 모여 살아서 해방촌이라 불렸습니다. 처음에 이렇게 저랑 둘째 형과 형수와 함께 해방촌 하꼬방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이렇게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공부를 잘해 서울대 토목공학과를 졸업했다. 그리고 1960년 공군 장교로 입대해서 많은 토목공사를 군생활 가운데 감독하게 된다. 1960년 소위로 임관하자마자 수원 10전투 비행단 기술 선임장교로 보직을 받고 수원 전투비행단 공항 활주로 공사를 총 감독했다. 

  

 그 후 그는 여러 토목공사의 공훈을 인정받아 공군 대위 시절 미국 오하이오 주에 있는 공군대학(Air University) 토목공학 과정 단기 유학을 국비로 다녀오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김해, 사천, 성남, 강릉 비행장 확장 공사와 경부 고속도로 비상활주로 건설을 총괄하는 업무를 담당하였다. 그는 공군장교이자 토목공학 엔지니어로 12년 동안 대한민국 중요 비행장 건설에 젊음을 바쳤다. 

  

그리고 1972년 예편을 하고 경남기업 해외 토목사업 본부장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마침 김해 비행장을 경남건설이 수주를 맡아 건설을 했기 때문에 그때의 인연으로 경남건설 정원성 회장이 그를 스카우트한 것이다. 그 후 그는 말레이시아에서 토목사업 본부장으로 근무를 하다가 1980년 호주로 이민을 왔다. 

  

▲ 조기덕 군(28)과 조영옥 양(25)은 1963년 10월 27일 종로예식장에서 결혼 후 60년 세월을 회로하고 다복한 가정을 이루었다.©크리스찬리뷰     

 

1부 호주 레드백 선정까지 숨막혔던 조기덕 회장의 역경 비하인드 스토리

 

2부 조기덕 회장의 K9 자주포와 장갑차 Redback이 선정되기까지의 이야기

 

 

칠전팔기의 인생

  

그는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정부의 정책변화로 인해 그의 인생이 여러 번 고비를 겪게 되었다. 사실 호주로 이민 온 것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 때문이었다. 

  

그가 근무하던 경남기업의 창업주가 갑자기 박정희 정권하에서 외화도피 반출이라는 억울한 죄목으로 인해 기업주가 바뀌게 되는 바람에 사표를 내었다. 그리고 말레이시아 현지 기업에서 5년 동안 근무하다가 아들의 교육문제가 걸리게 되었다. 

  

첫째 아들이 대학교에 입학할 무렵이 되었는데 하이스쿨까지는 인터네셔널 학교가 있어서 문제가 없었지만 공교롭게도 말레이시아의 대학은 모두 현지어로 수업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들의 대학공부를 위해 영국의 학교를 찾던 중 평소 알고 지내던 호주 대사관 직원이 호주대학을 추천하는 바람에 호주로 이민을 오게 된 것이다.   

  

호주로 이민온 후 그는 1981년 비콘 엔지니어링(Beacon Engineering)을 인수했다. 그리고 한국의 여러 대기업들의 하청공사들을 호주  현지에서 해나가던 중 국제건설의 가스파이프 라인 건설공사를 맡을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 때 국제건설이 갑자기 해체되는 바람에 그가 맡은 공사가 날아가 버리게 되었다.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두 번째 고배를 마시게 된 것이다. 

  

▲ 조기덕 베드로와 조영옥 레지나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호주를 방문 후 한국교회를 통해서 이 증서를 전달받았다. (2000. 7.5) ©크리스찬리뷰     

 

그러다가 그는 세 번째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바로 울릉공에 ‘한인산업센터’ 건설을 하고자 모든 것을 투자했다가 주 정부 정책이 바뀌게 되어 그의 투자는 물거품이 되고 전 재산을 날리게 된 것이다. 

  

“제가 1987년 한인회장에 당선된 후 정부 지도자들도 만나고 다른 커뮤니티들을 둘러보니 한인 커뮤니티가 다른 커뮤니티들보다 열악한 거에요. 그때만 하더라도 한인 동포들이 전문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청소나 용접일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걸 보니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그때 마침 NSW 주정부의 방침이 발표되었는데 시드니는 주거와 상업지역으로만 사용되고 모든 산업시설은 시드니 바깥쪽으로 내보낸다는 거에요. 그때 산업지역이 북쪽으로는 와용(Wyong) 남쪽으로는 울릉공(Wollongong) 서쪽으로는 캠벨타운(Campbeltown)이 발표되었어요. 

  

마침 잘 알고 지내던 전 울릉공 시장인 토니가 조상 때부터 울릉공 지역에 많은 땅을 가지고 있었는데 거기에 산업시설 DA를 받았어요. 그래서 제가 울릉공에 ‘한인산업센터’를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은 거예요. 

  

그러면 우리 동포들이 거기서 일을 하면 어려운 생활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한국 중앙상공인 연합회’에 가서 취지를 설명하고 당신들이 이곳에 공장을 세워주면 우리 동포들이 가서 일을 하게 되면 동포사회도 좋고 한국에도 유익이 된다. 

  

그랬더니 좋은 아이디어라고 하고 울릉공 정부도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고 해서 당시 600만 불을 투자했습니다. 돈이 모자라니 돈을 빌려서 땅을 매입한 거죠. 그런데 호주에 경제위기가 오는 바람에 주정부 계획이 백지화되었습니다. 그러는 바람에 저는 파산을 하고 모든 계획이 날아가 버렸습니다” 

  

▲ 조기덕 회장의 중재로 AID와 한화가 155mm 포탄 첫 공급 계약을 2004년 10월에 체결했다. 뒷줄 왼쪽부터 조기덕 회장, 한화 전무이사, 국방무관, 호주대사가 배석했다.©크리스찬리뷰     

 

그때 그는 경제적으로 큰 위기를 겪게 된다. 그래도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당시 북경 시장이었던 가경림 시장과 그의 부인 마담 림을 알고 지냈는데 그 부인이 자기 사업을 맡아 달라고 부탁을 해왔다. 조 회장은 록데일(Rockdale)에 있는 그녀의 공장 부지를 새로 개발하기 위해 DA를 받고 그곳에 주상복합 아파트를 건설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마침 들어와 있던 대우건설에 투자를 의뢰했다. 그는 한국에 나가 김우중 회장을 직접 만나 투자를 따내고 건설할 때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한국에 IMF가 오고 대우기업의 자금난이 어려워지는 바람에 실현되지 못했다. 1997년 네 번째 실패였다. 

  

그렇지만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이렇게 파산을 한 채 와신상담하고 있는데 ADI(Australia Defence Industries, 호주 방위 산업)에서 연락이 왔다. 

  

호주에서 여러 번 실패를 했지만 다 망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동안의 사업들을 통해 호주 정치가, 사업가들과의 네트워크가 그의 자산이 된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알았는지 ADI(호주 방위 산업청)에서 조 회장에게 연락을 해왔다. 공군 조종사들이 사용하는 벨지움 산 경기관총을 호주에서 만들고 있는데 이것을 한국에 팔아 주면 좋겠다고 의뢰를 해왔다. 이것이 그가 방산 중개 에이전시 비즈니스에 뛰어들게 된 시초가 되었다. 

  

GDI(Global Defence Industries) 에이전시

  

조 회장의 표현대로라면 ‘먹고 살기 위해서’ 경기관총을 팔려고  한국에 사방으로 수소문을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한 자루도 팔지 못했다. 

  

그런데 1998년 ADI에서 두 번째 연락이 왔다. 호주 국방부가 낙후된 M113 장갑차 업그레이드 프로젝트를 하는데 당신이 한국에 입찰 참여를 알아봐 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ADI가 저를 도와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호주 ADI의 요청이 제가 방산 중개 비즈니스를 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1998년 호주 국방부는 M113 장갑차 업그레이드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이때 마침 한국에서는 대우 중공업이 장갑차를 생산하고 있었다. 조 회장의 중재로 대우중공업의 K200 장갑차가 공개입찰에 참여하였고 2003년까지 5년간의 치열한 경쟁 끝에 K200이 최종 승자로 선정되었다. 

  

이 기간 동안 호주 국방장관을 포함한 많은 군 관계자들이 대우의 창원공장과 일선부대를 방문 시찰하였고, 한국의 방산 기술을 호주에 알리는 첫 기회가 되었다. 

  

▲ 한화디펜스 K9A1썬더 155 자주포 ©Hanwha     

 

대우중공업으로 업체 선정이 확정된 후 호주 국방부에서는 조 회장의 GDI 에이전시를 통해 한국군의 장갑차 부대의 동티모르 파견 지원을 요청하였고 이를 한국 국방부가 받아들여 1개 대대가 동티모르에 파견됨으로써 양국 간의 유대관계도 더욱 돈독하게 되었다. 

  

그런데 하늘이 무너지는 소식이 들려왔다. 한국의 대우그룹이 몰락하여 해체된다는 소식이었다. 그래도 대우중공업은 산업은행이 보증을 서고 K200 장갑차 양산과 양도는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보증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빌미로 삼아 호주 국방부 장갑차 업그레이드 사업은 독일로 이양되는 불운을 겪게 되었다. 다섯 번째 실패이다. 

  

이 소식을 들은 호주의 프리힐(Freehill) 로펌에서 조 회장에게 연락을 해왔다. 이것은 호주 정부의 명백한 계약 위반이다. 우리가 당신을 대신해서 호주정부와 소송을 할테니 당신은 합의금에서 우리 소송비만 주면 된다고 접근해 왔다. 어마어마한 금액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유혹했다. 

  

“그때 제가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개인 대 개인의 소송이 아니라 결국 국가 대 국가의 관계가 걸린 일인데 이 소송으로 한국과 호주의 관계가 어긋날 수도 있어서 마음이 편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후에 보니까 이것이 잘한 일이었습니다. 호주 국방부에서 저에게 고맙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호주 국방부에서도 내심 저희가 소송을 할까봐 걱정을 하고 있었는데 소송을 하지 않으니까 저를 신뢰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당신이 이번 일로 손해가 많았을 텐데 당신을 도울 수 있는 길이 없겠는가? 그리고 3개월 후에 ADI(호주 방  호주 국방부는 ADI를 통해 조 회장을 도울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2003년 ADI는 155mm 포탄 공급사업을 조 회장에게 의뢰해 왔다. 조 회장의 중재로 155mm 포탄 공급입찰에는 풍산이, 포탄 발사체 입찰에는 한화가 합동입찰 체제로 진행하였고 2004년 첫 공급 계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그동안 수많은 실패로 인해 조여졌던 조 회장의 숨통이 조금이나마 열리는 순간이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그때 제가 소송을 안한 것은 백번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 소송을 했었다면 오늘의 쾌거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 인터뷰를 마친 후 자택 거실에서조기덕 회장과 부인 조영옥 여사.©크리스찬리뷰     

 

내가 죽지않고 살아서 여호아께서 하신 일을 선포하리라.(시 118:17)

 

이후에도 조 회장은 크나 큰 좌절을 한 번 더 맛보았다. 조 회장은 2003년 호주 국방부가 주관하는 Land 17 자주포 사업에 삼성 테크윈의 K9 자주포를 AS9 호주식으로 개칭하여 입찰에 참여하도록 주선하였다. 

  

호주 방산 시장에 관심이 없었던 삼성이 관심을 갖도록 그는 임원들의 호주 방문 주선부터 삼성이 입찰에 뛰어들도록 공을 들였다. 조 회장의 방산 중재 에이전시는 한국 방산제품의 홍보 및 알선, 정보수집 및 교환, 입찰안내와 추진, 양국 간 상호교류 그리고 방문 주선에 이르는 모든 비용을 우선 자비로 수행한다. 

  

그리고 계약이 체결되면 그때 약정된 수수료를 수령하는 것이다. 계약이 체결되지 않으면 그 모든 비용은 다 조 회장 몫인 것이다. 

 

2003년부터 2012년까지 무려 10년 동안 공을 들여 삼성테크윈의 AS9 자주포가 우선협상 대상자로 선정되었고 호주 국방부의 사인을 마치고 호주 정부 NSC(National Security Committee)의 최종 집행 승인만 기다릴 때였다. 

  

호주 국방부가 승인했고 별다른 일이 없으면 승인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런데 2012년 줄리아 길라드 총리는 국고 예산 적자 보충책으로 이미 책정된 국방예산을 대폭 삭감시키고 Land 17 자주포 사업을 전면 백지화시켜 버렸다. 

  

이일로 삼성의 손실은 막대했다. 그리고 조 회장 역시 큰 좌절을 맛보았다. 그때 조 회장은 처음으로 자살을 생각했다고 한다. 

  

“삼성이 이 사업을 10년 동안 끌어오는 동안 US 달러로 10밀리언 달러(호주화로 1천500만 달러) 이상을 소비했습니다. 우선 협상 대상자로 선정되어 다 되었다고 판단하고 파티까지 했는데 이게 하루 아침에 날아가 버리니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같이 일했던 삼성 임원진에게도 볼 면목이 없고 저도 낙담이 되어 살 소망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저녁에 아내에게 다 같이 죽자고 하니 아내가 죽으려면 당신이나 죽지 왜 죄 없는 내가 같이 죽냐며 매몰차게 꾸짖었습니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조 회장을 버리지 않으셨다. 그리고 기적은 전혀 다른 곳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소련의 붕괴 후 유럽의 지형이 바뀌면서 동구 유럽 나라들이 자국의 자주적 방어를 위해 군비 증강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다행히 삼성테크윈은 그동안 개발했던 자주포 사업의 노하우를 사장시키지 않고 유럽시장을 공략하는 데 눈을 돌렸다. 

  

▲ 특별한 일이 없는한 조기덕 회장 부부는 매일같이 고스포드 해변가를 산책한다. 산책 중 벤치에 앉아 휴식 중인 부부.©크리스찬리뷰     

 

그리고 방산 중재 경험이 있는 사람이 필요하던차, 10년 동안 보아왔던 조 회장의 아들 리차드에게 같이 일하자고 러브콜을 보내왔다. 조 회장의 아들 리차드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조 회장과 같이 일해온 방산 중재 비즈니스 전문가였다. 

  

그렇게 3년 계약직으로 삼성에 들어간 리차드는 노르웨이에서 열리는 자주포 사업설명회에 홀로 참석하게 되었다. 

 

“노르웨이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대부분 나토  (NATO) 회원국이잖아요. 아들 얘기로는 독일이 NATO 회원국이기 때문에 분위기가 벌써 독일제로 기울어져 있더래요. 

  

사업 설명회가 끝난 후 리차드가 혼자 외로이 커피숍에 들어가 커피를 마시는데 마침 그날 설명회에 참석했던 노르웨이 국방부의 담당자들이 커피숍에 들어오는 겁니다. 그때 옆에 앉은 리차드와 자연스럽게 얘기가 오고 가는데 노르웨이 국방부 직원들이 질문을 하더랍니다. 

  

“호주도 NATO 회원국인데 같은 NATO 회원국인 독일 자주포를 선택하지 않고 왜 잘 알지도 못하는 한국 자주포로 결정했냐?” 

  

그래서 리차드가 삼성과 호주가 10년 동안 진행되어 왔던 사항들을 모두 설명을 해줬답니다. 그랬더니 노르웨이 국방부 직원들이 그렇다면 우리도 공정하게 테스트를 거쳐서 결정하자 그러더라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삼성 자주포를 공정하게 테스트할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리차드가 삼성에 3년간 계약직 직원으로 간 것부터 노르웨이의 커피숍에서 우연히 노르웨이 국방부 담당자들을 만난 일까지 우연 같지만 여기에는 하나님의 기막힌 섭리가 있었다. 

  

이러한 공정한 평가를 통해 한국의 자주포가 독일제보다 우월하다는 결과가 나왔고 노르웨이를 선두로 덴마크, 핀란드, 에스토니아까지 삼성의 자주포를 선택하는 쾌거를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호주 국방부에서도 지난 번 자주포 백지화가 미안했던지, 미국의 레이시온(Raytheon)사를 배제하고 한국의 삼성에 시기에 제한없이 자주포 제안서를 제출하라고 요청해 왔다. 

  

호주 국방부와 삼성 간의 협의가 진행되는 동안 한국에서 기업의 미래 대항책으로 특정 기술 집약 사업이 시행되면서 삼성은 반도체만 집중하기로 하고 삼성테크윈의 자주포 사업을 한화로 이양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GDI는 한화의 에이전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리고 조 회장은 한화에 호주의 Land 8116 자주포 사업에 다시 참여해 줄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2012년 호주 정부가 보여준 부당한 정책에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던 한화는 망설였다. 

  

그러나 조 회장의 끈질긴 요청과 오랜 고민 끝에 한화가 호주 자주포 사업에 참여하고 독일과의 치열한 경쟁 끝에 2021년 호주 국방부는 한국의 한화로부터 자주포 공급을 체결하게 되었다. 

  

그리고 연이어 2023년 독일의 링스(Lynx) 장갑차를 제치고 한화의 ‘레드백’(Redback) 장갑차까지 결정된 것이다. 

  

최종적으로 계약이 체결되기까지 늘 살얼음을 겪으며 긴장을 놓을 수 없었던 그의 인생에 하나님께서 이번에 큰 위로를 주셨다. 그러나 이번 레드백 계약에도 고비가 있었다. 지면상 구체적으로 얘기할 수 없지만 수많은 고비를 넘겨야 했다. 그리고 숨막히는 고투 끝에 최종적으로 레드백이 선정된 것이다.  

  

조 회장의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니 그가 고백하는 시편의 말씀이 꼭 그의 인생을 대변하는 말씀처럼 다가온다.

  

“내가 죽지 않고 살아서 여호와께서 하신 일을 선포하리라”(시 118:17) 〠 

 

주경식|본지 편집국장

권순형|본지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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