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사랑의 부채, 극히 일부 상환

경남선교 120주년 기념관 개관

글ㅣ송기태,사진ㅣ권순형 | 입력 : 2010/09/27 [14:47]
점점 더 멀리, 땅끝으로, 흑암의 세계 속으로

 “하나님은 단 한 분밖에 없는 그분의 독생자를 선교사로 만드셨다!”

그리하여 천상의 나라에서 낮고 천한 이 땅에 선교사로 오신 그분은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으로 참 선교사의 규범을 보여주셨다. 그분이 맺은 선교의 열매는 그분이 재생산하신 사도들을 중심으로 오대양 육대주에 주저리주저리 풍성하게 열렸다.

▲ 경남 창원공원묘원에 신축 중인 ‘경남선교120주년기념관’ 건설 현장     ©크리스찬리뷰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라고 하신 그분은 친히 목숨을 버리시면서 최고의 사랑을 보여주셨다. 그분의 복사판같은 사도 바울은 가장 헌신된 선교사의 삶을 살며,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역설했다. 우리는 이토록 힘주어 말하는 그의 음성에서 또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하시던 그분의 외침을 기억해 낸다.

아울러 우리는 모든 율법을 다 이루고, 가장 큰 사랑을 실천하신 그분의 삶을 따라, “멀리, 점점 더 멀리, 땅끝으로 알았던 흑암의 세계 속으로” 찾아 도착한 한 무리의 ‘거룩한 군대’를 기억한다. 그 땅 끝, 흑암의 세계가 바로 가난한 나라, 조선의 남동쪽으로 이곳 호주에서 달려간 ‘아름다운 발길들’이 있다. 그들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한국 땅에 청춘을 바쳤고, 눈물을 심었고, 기도를 심었고, 육신을 묻기도 했다.

▲ 사면이 탁 트인 공간은 마치 현대판 정자같다.     ©크리스찬리뷰

그들의 삶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성과나 결과에 상관없이 복음을 선포하도록 운명지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 한 분만이 세상을 구원하실 수 있으나, 그렇다고 그리스도 혼자서 세상을 건지시지는 않는다”는 말을 명심하며 그리스도와 기꺼이 동역자로 헌신했다.

121년 전, 그들이 도착한 경남·부산 지역이 어떤 땅인가? 해인사, 통도사, 범어사가 말해주듯 남부 지역 불교의 본산지였다. 지리산 청학동이 상징하듯 남명 조식 선생을 중심으로 한 영남학파 유교의 본류가 흐르는 곳이 바로 부산 경남 땅이다. 그들은 아무런 선입견 없이 이 땅에 도전했다.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생명을 걸었다. 그리고 뒤돌아보지 않았다.

▲ 10월 2일 개관하는 ‘경남선교120주년기념관’은 건평 92평에 과거관, 현재관, 미래관을 설치하고 호주 선교사들의 발자취, 경남기독교의 현주소,  선교 경남의 모습 등을 재조명하는 전시실을 갖추고 1천여 점의 선교 유품들을 전시할 예정이다.   ©경남성시화운동본부

“나는 이제 죽어 가지만, 지금까지 전 세계를 위하는 일 외의 다른 일에는 내 삶을 허비하지 않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나는 오직 영혼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해서 내가 어디에서 어떻게 살았으며 또 내가 어떤 고생을 겪었는가 하는 것은 개의치 않는다”라고 한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삶이 그들의 삶이었다고 감히 단언할 수 있다.

복음이 심어지기에 가장 척박한 땅 중에 하나로 꼽혔던 경남·부산 지역은 한 알의 밀알처럼 죽어지고 썩어진 선교사들의 나눔과 섬김, 그리고 처절한 헌신이 있었기에 한국 교회사에 별처럼 빛나는 주기철, 손양원 목사 같은 순교자들이 배출될 수 있었다.

 
척박한 땅, 황무지의 개척자들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따라 초기 호주 선교사들의 왕성한 활동무대였음에도 여전히 부산·경남의 복음화율이 한국 전체 복음화율보다 월등하게 낮은 것이 가슴 아프게 한다. 현재 대한민국 전체 광역시에서 가장 복음화율이 낮은 곳으로 추정된다. 5년 전, 2005년 통계로 보면 경남 복음화율은 8.6%였다. 교인 수는 259,439명. 울산광역시가 분리되지 않은 15년 전의 복음화율은 9.2%. 교회는 2111개로 1999년에 비해 437개 증가했다. 2010년 현재 급증하여 4,400여 교회로 추산되고 있다.

 
▲ 경남 창원 호주 선교사 순직묘원에 안장된 8명의 선교사들은 복음전파와 개화활동을 하다 과로와 풍토병에 걸려 한국땅에서 숨졌다.     ©크리스찬리뷰

복음화율이 가장 높은 곳은 거제시(13.1%). 진해시(12%) 김해시(9.6%) 통영시(9.4%)가 그 뒤를 이었다. 최하위는 합천군(5.1%). 김해시는 교회 243개,교인 4만 1,068명으로 각각 1위를 차지했다. 교회 수에서 마산 창원 진주 거제 등이 2∼5위에 올랐다. 창원 마산 거제 진주가 교인 수 2∼5위를 차지했다.

부산의 2005년 당시 복음화율은 10.4%였다. 교인은 36만 4592명. 1995년에 비해 0.8%포인트 감소했다. 교회 수는 1,379개로 1999년에 비해 111개 증가했다.

가장 높은 복음화율을 보인 곳은 서구(13%). 영도구(12.9%) 해운대구(12%) 수영구(11.9%)가 그 뒤를 이었다. 사상구(8.2%)가 최하위를 기록했다. 해운대구는 교회 174개,교인 4만 6,770명으로 각각 1위를 차지했다.

부산 기독교 역사는 동구에 있는 부산진교회, 초량교회 및 일신여학교에 의해 형성됐다. 특히 부산시 지정문화재 제55호인 일신여학교는 부산지역 최초의 근대 여성교육 시설이다. 호주장로회 제임스 H. 맥케이, 벨리 맨지스 선교사 등에 의해 시작됐으며 이 학교 출신인 박순천, 김차숙 등이 부산지역 항일 만세운동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 호주 선교사 순직 기념 비문     ©크리스찬리뷰

호주 선교사들은 부산을 선교 베이스 캠프로 삼고, 경남 지역인 진주, 마산, 거창, 통영에 선교지부를 설치하여 전도, 교육, 의료 등 3개 분야에서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펼쳤다. 그렇게 호주 선교사들의 뿌린 선교의 씨앗은 분명 경남·부산 성도들에게는 ‘사랑의 부채’였다. 은행 부채가 소위 ‘종자돈’이 되어 대형 회사를 이루듯, 사랑의 부채가 경남·부산의 전 도시를 성시화하는 원초적 사랑이 될 것이다. 121년이란 세월 속에 거목으로 성장한 경남의 교회들이 그 사랑의 부채를 갚는 일련의 운동을 일으켰다. 이른바 ‘부채 보상운동’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아무리 갚고 갚아도 원금조차 상환 할 수 없을 테지만 그래도 작은 출발이 큰 일을 이루는 첫출발임은 부인할 수 없다.

작은 출발은 지난 해 9월 19일 한·호 선교 120주년을 기념하여, 경남지역 복음화와 개화를 위해 헌신하다 한국 땅에 뼈를 묻었던 호주 선교사들을 위해 ‘순직 호주 선교사묘원’을 창원공원묘원에 조성한 것이다.

경남성시화운동본부(대표회장 구동태 감독, 이하 경남성시화)가 주관한 이 사업은 공원묘원 중심부에 위치한 3300㎡(1000평) 규모로 준공되었으며, 선교사 묘원은 300평의 묘역과 주변 공원부지 700평으로 갖춰졌다. 이곳에는 한국 도착 6개월 만에 과로와 풍토병으로 별세한 조셉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당시 33세)를 포함해 일제 강점기 이전에 경남에서 활동하다 순직한 8명의 선교사 기념비가 세워졌다.

 
▲ 호주 선교사들의 유품들.
경남성시화운동본부는 창원공원묘원에 ‘경남선교 120주년 기념관’을 건립, 10월 2일 개관식에 호주 선교사와 가족 21명을 비롯, 호주 한인 교계인사 13명 등 34명을 초청했다. 사진은 호주 선교사와 가족들이 기념관에 전시할 유품을 기증해 왔는데 이 중에는 1897년에 출간된 한국에서 나온 최초의 한영사전을 비롯해 호주 선교사들의 보고서, 성경공부 교재 등 다수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한국선교 초기 선교사들이 사용했던 복음의 열정과 헌신의 땀이 배어 있는 성경책들과 함께 1960년대 마산에서 가난하게 살던 여성(특히 미망인과 고아)들을 돕기 위해 호주 가정에서 쓰는 수예품을 만들어 호주로 보내 판매하여 그 대금을 받아 생계를 유지하게 했던 수예품들, 그리고 가족들이 그동안 애장하던 타자기 등 각종 유품들이 경남선교 120주년 기념관에 기증됐다.          ©크리스찬리뷰

기념비에 새긴 전문은 다음과 같다.

 구한말 우리나라는 국권이 쇠잔하고 열강은 우리나라를 서로 삼키려 각축하고 민생은 도탄에 빠져 신음하던 암울한 시대에, 우리 민족의 복음선교와 우리나라의 개화를 위하여 호주 데이비스 목사가 1889년 첫 선교사로 한국에 도착하여 순직한 이래 해방 전까지 호주 선교사 78명이 한국(부산, 경남지역)을 위해 복음, 교육사업, 의료봉사를 하였다. 그 가운데 8명의 선교사는 부산, 경남 지역에서 순직을 하고 한국인을 위해 귀한 생명을 바치셨는데, 이 고귀한 순교정신이 밑거름이 되어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는 크게 성장 부흥하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위 8명 순직 선교사의 묘지, 묘비를 보존하지 못한 것을 우리는 송구하게 생각하여 늦게나마 호주선교 120주년을 맞이하여 우리의 뜻을 모아 여기 8명의 순직 선교사의 이름을 새긴 기념비를 마산공원묘원에 세운다. 순직 선교사의 숭고한 희생과 순교정신을 영원히 기리며 후학들에게 선교유적지로서 신앙의 교훈이 되기를 기원한다.”

 
그 땅에 뿌려진 씨앗들

순직 선교사 묘비는 한글과 영문으로 만들어졌으며, 현대적 감각을 가미한 디자인에 최고의 원석을 도입해 제작했다. 한국 땅에 묻힌 선교사들은 △조셉 헨리 데이비스 △아서 윌리엄 앨런 △아이다 맥피 △ 윌리엄 테일러 △ 엘리스 고던 라이트 △거트루드 네피어 △엘라이사 애니 아담슨 △사라 맥케이 등 8명이다. 

 
▲ 호주 선교사들이 한글을 배웠던 노트     ©크리스찬리뷰

참으로 척박한 땅에 이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에 주기철, 손양원 목사라는 한국 교회의 걸출한 선각자가 열매맺힐 수 있었다. 이들의 묘역 양옆에 경남 출신의 순교자인 주기철, 손양원 목사 기념비도 함께 세워져 경남 지역 신앙의 뿌리와 열매를 한눈에 알아보는 좋은 시청각 자료가 되었다. “씨앗 한 알은 셀 수 있지만, 씨앗의 씨앗은 셀 수가 없다”는 말을 실감케 한다.

 
씨앗의 씨앗들

경남성시화 대표 본부장 이종승 목사는 “경남지역이 선교사들의 복음을 받아 현재 4천400여 교회로 열매를 맺었습니다. 선교 120주년을 기념해 15명의 경남지역 교계 지도자들이 호주를 다녀왔는데 이를 계기로 호주 선교부의 영향으로 세워진 100년 이상된 교회를 찾게 됐습니다. 처음에는 ‘100년 된 교회 숫자가 60여 개 정도 될 것이다’고 생각했는데 최종 179개로 확인된 후 너무도 놀랐습니다. 호주 선교사들이 우리들 신앙의 뿌리라는 것을 잊지 않고 기억해야 합니다”라고 강조했다.

 
▲ 주기철 목사     ©크리스찬리뷰


경남성시화 상임회장이자 예장 고신 총회장인 윤희구 목사는 “100년 동안 경남 지역에 복음을 전하며 자리를 지켜온 교회들에 100번을 감사해도 부족합니다. 200년 될 때까지 지역사회를 지키고 든든히 서가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일제 시대를 거치며 신사참배를 반대한 경남 지역 교회들의 정체성이 어디서 왔을까 생각해봤습니다. 그 전통은 바로 경남지역에 복음을 전한 호주 선교사들로부터 왔고, 호주 선교사들은 영국의 스코틀랜드의 신앙적 전통을 이어받았습니다.

호주 선교사들은 그 누구보다도 신사참배에 반대할 것을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러한 경건한 신앙적 전통을 경남지역의 교회들이 이어 받은 것에 대해 자부심을 느낍니다”라고 밝혔다.

존 브라운 목사가 쓴 <은혜의 증인들>을 번역한 정병준 교수(호남신학대 역사신학)는 “호주 선교사들의 특징은 한국인과 똑같이 먹고 자고 생활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그들이 마을로 직접 들어와 주민과 접촉하며 풍토병에 걸리고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해 크게 곤란을 겪었습니다. 마을로 들어온 선교사들을 구경하다가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호주 선교사들은 고아원과 병원, 학교를 설립해 영남 지역의 근대화에 혁혁한 공을 세웠습니다”라고 평가했다.

필자는 작년 경남성시화 대표회장인 구동태 감독이 “한 명의 호주 선교사가 대한민국에 들어와 세 명의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 세 명의 옥동자는 병원, 학교, 교회인데, 병원은 일신기독병원, 학교는 창신학교 한 개씩 남았는데 교회는 무려 4천여 교회로 많아졌습니다. 모판에서 모가 이양되어 심기어지듯이 호주 선교사들로부터 확장된 교회들이 경남의 20개 시군에만 2천400여 개가 있고, 부산과 울산까지 포함하면 그 수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습니다.

 
▲ 평양형무소에서 옥중 순교한 주기철 목사의 장례식 장면(1944년)     ©크리스찬리뷰

그 모판 역할을 했던 교회들, 즉 선교 초기 설립된 100주년 이상된 교회들의 지도자들이 이처럼 귀한 자리에 함께 모여서 감사예배를 드리게 되어 너무나 감격스럽습니다”라고 한 말을 기억한다. 참으로 탁월한 비유였다. 여기서 하나 빠졌다면 선교사들의 열매 가운데 탁월한 인물들이다.

물론 선교사들의 육성을 직접 듣고 배운 인물들도 많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게 ‘씨앗의 씨앗’으로 간접적으로 맺혀진 인물도 주옥같은 인물들이 얼마나 많은가! 여기서 우리는 선교사들의 묘비와 함께 서있는, 시대와 국적을 초월하여 나란히 서있는 주기철, 손양원 목사의 행적을 추적해볼 필요를 느낀다.

 
주기철, “슝늉 한 그릇이...”

 20여 년 전, 극동방송 ‘신앙논단-하나되게 하소서’를 진행할 때였다. 당시 극동방송 부사장이자, 주기철 목사의 4남 주광조 장로를 통해 주기철 목사의 순교사화를 생생하게 들으며, 그 수기를 펴낸 적이 있다. 그의 아들을 통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몇마디 말이 있다. 평양형무소에서 부친의 고문 장면을 보고 충격을 받은 당시 5세쯤 되었던 주 장로는 실어증에 걸려 몇 년 동안 말을 못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로 규정하며 단호히 거절한 대가로 감옥에서 온갖 고문에 만신창이가 된 주기철 목사가 마지막 숨을 거두며 한 말이다.


▲ 손양원 목사     ©크리스찬리뷰

 “쑥갓을 실컷 흰밥과 함께 먹고 다시 생각이 안 나도록 했으면 합니다.… 따스한 숭늉 한 사발을 마시고 싶소.”

한국교회의 영웅적 순교자로 기록된 주기철 목사의 가장 인간적인 면모가 드러나는 절규이다. 그는 결코 강인하고 용맹스럽게 신앙을 증거하고 죽어간 순교자는 아니었다. 그 역시 보통 사람이 느끼는 먹고 마시는 본능에 약하여 넘어지기 쉬운 성정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참으로 여린 인간의 풍모를 짙게 보인다. 그럼에도 그는 원초적인 본능을 넘어 기꺼이 ‘한국의 스데반’이 되었다.

1938년 2월부터 최후를 맞은 1944년 4월까지 모두 네 차례의 구속, 지속되는 고문과 차가운 감옥생활은 무릎에서 흘러나온 피와 무명옷이 꽁꽁 얼어붙어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고 한다.

“주님! 저 이러다가 순교 못할 것 같습니다. 순교하도록 이끌어 주옵소서.”

그 역시 감옥의 지독한 고문에 내내 불안하였고, 정신적 압박과 육체적 고통으로 인하여 일제의 강압에 굴복할 것 같은 위기감을 느꼈지만 잘 이겨내었다. 마지막 지아비의 시신을 알콜로 거두던 오정모 사모는 울부짖는 성도들을 향하여 “지금은 울 때가 아닙니다.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라고 권면했다는 주 장로의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약했지만 강한 자,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지만 모든 것을 가진 자, 패배한 것 같지만 한 순간 한 순간을 기어코 승리해낸 주기철 목사는 경남(창원 웅천)이 낳은 위대한 거성이다.

주기철 목사의 본명은 ‘기복’이었으나 오산학교 시절, ‘기독교를 철저히 신앙한다’는 뜻인 ‘기철’로 바꾸었다고 한다.

목사파면의 위협 속에서도 그는 조금도 망설이거나 굽히지 않았다. 1938년 전국 27개 노회 대표가 “신사참배는 종교가 아니라 국가의식”이라며 찬성 결의를 할 때 예비 검속되어 갇혀 있었다. 주기철은 1940년 2월 산정현 교회에서 ‘다섯 종목의 나의 기원’이란 유언설교를 한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해 달라, 오랜 고난을 견디게 해 달라”면서 노모와 처자를 부탁한 주기철은 ‘일사각오’의 의지를 밝힌다. 일사각오는 일제의 살인적 탄압에 몸으로 맞설 수밖에 없는 한 종교인의 신앙고백이었다. 이 설교 후 다시 검거되어 황실불경죄 및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10년 형을 언도 받고 복역했다.

이듬해 12월 19일 평양 임시노회에서 신사 참배를 거부하다 소속 교단으로부터 목사직 파면당했다. 그 이후 조 목사는 67년 만에 교단으로부터 명예회복·복권되었다. 예장통합 평양노회는 2006년 4월 17일 경기도 남양주 동화고교에서 ‘참회예배’를 올리고 주 목사에 대한 노회원 자격을 복권한다고 밝혔다.

해방 당시 50만 명이 채 안 되던 개신교의 급속한 성장은 이런 순교자의 희생 덕분이다. 

 
손양원, 나환자들의 영원한 벗

손양원 목사, 그 역시 호주 선교사의 열매 중의 열매이다. 경남 함안군 칠원면에서 출생한 그를 가리켜 한명동 목사는 "20세기가 낳은 한국교회의 거성이다. 손 목사는 존재 그 자체로 남에게 은혜를 주는 언제나 말보다 실천이 앞서는 사람이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한국교회가 낳은 세계적인 성자요, 목회자요, 순교자였다. 그의 전기가 <사랑의 원자탄>이 될 만큼 그는 원자탄같은 폭발력으로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감화를 끼쳤다.

▲ 애양원 교인들과 기념촬영한 손양원 목사 (앞줄 가운데)     ©크리스찬리뷰

그는 옥중에서도 전도를 그칠 줄 몰랐기 때문에 결국 독방으로 옮겨지기까지 하였다. 검찰조서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그는 일본 천황폐하를 신으로 받아드리지 않으며 신사 참배를 거절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하나님만이 유일신이며 예수님만이 속죄주인 사실을 전하는 전도의 기회로 삼았다. 물론 그런 전도가 오히려 자신에게 불리한 재판 결과가 내려질 것을 잘 알았다. 그럼에도 자신의 안위보다 심문하는 검사를 향한 전도에 힘씀으로 복음전파의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 하였다. 마치 아그립바왕이나, 베스도, 벨릭스총독의 재판장에 선 바울의 변증자세와 같은 전도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사형자에 끌려가는 도중에도 전도함으로 사형직전까지 전도한 토마스 선교사를 연상시킨다.

특히 애양원교회를 시무하면서 양떼들을 위하여 설교한 메시지는 철저한 성경중심적인 ‘말씀의 사자’였다. 그의 설교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의 설교란 꼭 '성경말씀에만 터를 닦고'라고 한 대로 66권이 본문이요, 제목이요, 대지도 소지도 이를 기초로 합니다. 성경에서 성경을 전부로 삼고 성경으로,성경을 풀고 싶습니다."

6.25 동란 당시 장로 집사들이 피난을 위하여 배를 준비하여 손 목사와 가족들의 피난을 재촉하였으나 “양들을 버리고 목자가 어떻게 자신의 안전만을 위하여 떠날 수 있겠느냐?” 하면서 거절하다 끝내 양떼들과 함께 공산치하의 핍박을 견디다가 순교의 제물이 되신 것이다. 선한목자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목자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그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 참 목자요 선한 목자였다.

목자로서 그의 모범은 맡겨진 양떼를 사랑하는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용서해줄 뿐만 아니라 양아들로 삼아 키우는 철저한 원수사랑에도 나타났다. 순교의 역사는 교회의 역사만큼 길다.교회사는 순교자의 피로 점철되며 기록되었다. 그 긴 순교역사 가운데 손양원목사 부자의 순교기록은 가장 빛나는 페이지 중에 하나이다. 그 역시 호주 선교사들의 뿌린 복음의 씨앗의 씨앗이 열매맺은 것이다.

 
현대판 정자, 120주년 기념관

이제 경남성시화운동본부는 사랑의 부채 가운데 제일 끝자리라도 갚는 마음을 표현했다. 호주 선교사들이 순교하는 마음으로 선교한 땅에 그 열매로서 나란히 주기철, 손양원 목사의 기념비도 나란히 서서 역사의 흐름을 증언해주는 듯하다.

 
▲ 숲 속에 모습을 드러낸 경남선교 120주년 기념관     ©크리스찬리뷰

묘역을 정비하고, 기념비를 세우고, 경남선교 120주년 기념관을 세웠다. 이번에 준공하는 기념관의 사면이 탁 트인 공간은 ‘현대판 정자’같다.

옛날 정자에서는 옛 선비들이 자연을 바라보며 시를 지었다. 사무실의 무미건조한 에어컨 바람을 쐬며 시를 지은 것이 아니라, 하늘거리는 코스모스 향기를 품은 가을바람을 맞으며 지었다. 옛 정자에는 그곳에서 당대의 기라성같은 선비들이 지은 시가 걸려있다.

그러나 ‘기념관 정자’는 창조세계와 복음이 어우러지고, 호주 선교사들의 가치있는 삶과 사역이 기록되어 있다. 땅끝까지 사랑한 옛 선교사들의 깊은 헌신의 의미를 묵상하며 새로운 헌신을 결단하는 현장이 될 것이다. 이 기념관 정자에서 과거와 현재가 만나고, 호주와 한국이 만난다. 꽃이 진 자리마다 열매가 익어가듯, 시간이 흐를수록 성도들의 신앙도 익어갈 수 있는 현장이 될 것이다. 말이 필요 없는 조용한 기도가 스며있다.

 “나에게 하나의 열심이 있으니, 그것은 오직 주님, 오직 주님뿐이다”라고 고백한 선교사들의 고백도 은은히 들려온다. “내가 천 개의 목숨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모두 경남에 바치겠다”는 일사각오로 경남선교를 위해 헌신하다 뼈를 묻은 선교사들의 열정이 뿜어져 나온다.

 “교회의 존재 가치가 정당화될 수 있는 길은 교회가 선교의 책임을 이룩하는 것밖에 없다”,  “병든 교회를 위한 최선의 치료법은 선교를 위한 식이요법을 시키는 것이다”라고 오늘의 교회를 향하여 말없이 교훈하는 옛 선교사들의 ‘가슴의 언어’가 들어오는 듯하는 현장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으로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면 내가 아무리 큰 희생을 치른다 할지라도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라고 한 피터 마샬과 이곳에 묻힌 선교사들이 합창을 하는 듯하다. 하나님을 위해 순결한 마음을 바치며, 경남 성시화를 위해 위대한 일을 시도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상급을 받았을 옛 호주 선교사들의 부채를 언제 다 갚을 수 있으려나? 아니면, 천국에서 “우리가 경남에서 우리의 인생을 바친 것은 ‘사랑의 부채’라거나 희생이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그건 오히려 우리의 특권이었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있을지?.

‘오직 한 번뿐인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며,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 것인가?’ ‘하나님앞에 진정 가치있는 삶,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존귀한 삶은 무엇인가?’를 묵상하며, 자문자답할 수 있는 현장이 바로 ‘120주년기념관정자’이다.

 

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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