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의료복지재단 선교사로 떠나는 오진백 집사

북방의 척추를 고치렵니다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09/04/30 [14:39]
▲ 카이로프랙터인 오진백 집사는 샘의료복지재단 선교사로 파송받아 중국 단동복지병원에서 사역하게 된다   ©크리스찬리뷰
한 차 안에서 정반대로 달리던 날

 
포항에서 신체검사를 받고 서울로 올라오던 22세의 한 청년은 갈림길에 섰다. 그가 신체검사장에서 마주쳤던 친구가 귀경길 기차 안에서도 마주쳤다. 분명 같은 목적지를 가는 열차를 타고 있는데, 그 친구와는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 친구는 이름답게 천국의 수도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같은데, 자신은 죽음을 향하여 달음질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 귀경길의 열차 안이 이십대 청년의 인생을 바꿔놓을 줄이야! 그때 그 청년이 바로 단동복지병원에 선교사로 떠나는 오진백 집사(시드니동양선교교회)이다.
 
그 이후 30년이란 세월의 덮개는 그를 선교사로 바꿔놓는 위대한 역사가 일어난 것이다. 
 
"그때 친구인 서울침례교회 강수도 전도사가 포항에서 신체검사 때 만남 바로 앞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서울로 올라오던 기차에서 그 친구가 복음을 전도하여 그날 밤 기차 안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믿고 입으로 시인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후 그의 삶은 다음 해(1979년) 성탄절, 당시 서울침례교회를 담임하던 이동원 목사에게 침례를 받았다. 이듬해 신체검사 받은 대한민국의 남성들이 당연히 갖게되는 국방의 의무를 위하여 입대했다가, 소위 '개구리복'이라 일컫는 제대복을 입을 때쯤 상상하지도 못할 일이 일어났다. 믿는 자에게는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는 찬송가를 그렇게도 많이 불렀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정반대로 굴러가고 있었다. 
 
"군대 가서 제대할 때 집이 파산했습니다. 사업이 부도나서 집안 식구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의가사 제대할 정도로 집안이 파산되었습니다. 입대 전 다니던 학교도 다 못다녔습니다."
 
그리하여 들어간 곳이 기독교 출판사인 기독지혜사였다. 그곳에서 '강해설교 연구대계'라는 전집물의 책임편집자로 일했다. 기독지혜사 재임 중에 평생의 반려자인 정성희 집사를 만났다. 동생이 선교사일 정도로 신실한 가정 출신이었다. 그곳에서 성실함과 능력으로 과장에 진급해도 가정경제를 채워나가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리하여 '지식인의 직업'이라는 출판계도 2년 반만에 접을 수밖에 없었다. 소위 월급받는 생활로는 가정이 회복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척추교정을 공부하여 대치동에 활기원이란 척추교정원을 운영했습니다. 형편이 안좋은 사람은 무료로 치료도 해드렸습니다. 아내가 그 어려운 가운데 동생들 대학 공부를 다 시켰습니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주목되는 것이 있다. 그의 막내동생이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되었는데, 바로 그가 젊은 나이에 한국 침례교의 장자교회라 할만한, 서울침례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한 오진철 목사이다. 그가 처음 예수 믿고 신앙생활한 교회에 동생이 담임목사로 부임하는 아름다운 이변이 일어난 것이다.
 
가시나무새와 호주 이민
 
막내가 대학을 졸업하자 그동안 정신없이 앞만 보며 뛰어온 삶을 잠시 돌아보았다.
"동생들이 공부하고 나니 한국이 너무너무 답답해졌습니다. 그때 '가시나무새'를 보고 자기 집이 불타는 것을 보고, 이런 나라에 가서 살아봐야겠다는 동경이 생겼습니다. 호주에 대한 책 한 권이 동기를 부여해 주었습니다."
 
모든 짐에서 해방된 자유인이 된 그는 이민 가방을 꾹꾹 눌러서 채운 짐과 함께 88년 말 호주로 이민을 왔다. 그때부터 생업으로 치료하던 척추교정 기술을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로 생각하며, 지금까지 아무 조건 없이 하나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사용하기로 작정했다. 
 
"치료하면서 돈받는 것이 너무너무 싫었습니다. 다 아프고 어려운 사람들인데 말입니다. 일단 호주에 도착하여 밤에는 TAFE에서 치료 마사지를 공부하고, 낮에는 생계를 위하여 타일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타일을 오래 하니 허리가 안좋아졌습니다. 남의 허리를 치료해 준다면서 내 허리가 먼저 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이웃에게로 돌려드린다는 작정을 하고 나니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과거에는 환자들이 한두 달 걸려 낫던 것이 하나님께 드린다는 고백을 하고나니 한두 달이 아니라 두세 번 만에 치료되는 경험을 했습니다. 은사적인 측면이 있다고 고백했고, 나 자신 그걸 확실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내가 이걸 무료로 해준다고 공개적으로 오픈하면 이 일로 생계를 하고 있는 사람에게 피해를 주니 공개적으로 봉사하지는 못했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한두 번 오면 낫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척추가 교정되고 치료받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의 치료조건은 4가지였다.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나, 무조건으로!'
 
그랬더니 다른 데서 치료 안되던 사람, 형편 안되어 치료 못받고 있던 사람은 교회나 교단을 가리지 않고, 누구라도 아무 조건 없이 누구라도 치료해 주었다. 낮에는 일하고, 저녁 때는 치료하고 두 가지 일을 호주 이민 온 이후 지금까지 계속해 오고 있다. 
 
"이런 일을 안 했으면 섬기는 즐거움을 어디서 맛봤겠어요? 어려움은 있었지만 작은 꿈을 이뤄서 기쁩니다"라고 하는 그의 말에서 신실함과 진지함이 배어나왔다. 
 
▲ 중국 단동에서 단기사역중 환자를 치료하는 오진백 집사. 그는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나, 무조건으로'라는 4가지 치료 철학을   ©샘오세아니아
열심이 특심

 
지역 교회에서의 사역과 봉사도 열심히 특심하였다. 이민 직후인 89년부터 소그룹 지도 사역을 해왔다. 특히 교회가 가장 어려울 때 부흥의 핵이 되기도 했다. 이에 대하여 그와 몇 년 동안 동역해온 김강산 목사의 말을 들어보자. 
 
"오 집사님은 영적으로 성령께 민감해지기 위해 말씀을 배우는 시간이나 개인적인 경건생활에 최선을 다하는 신실성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 제자훈련반 교사로 섬기면서 아비의 심정으로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세워가는 사역을 지금까지 열정적으로 잘 감당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오 집사님은 성령님께 민감하게 반응하고, 민첩하게 행동하는 모습으로 감동을 줍니다.
 
그리고 오 집사님은 정서적으로 안정감이 있는 분입니다. 모든 판단이 극단적이지 않고, 조화와 형평성을 고려하고 입체적인 시작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대처하는 지혜로움이 돋보이는 분입니다. 그래서 성도들과의 관계에서도 호감을 주는 성품을 지녔고, 주변에 교제하는 성도들에게 모델이 되는 분입니다." 
 
김 목사의 오 집사에 대한 칭찬은 끊이지 않는다. 평소에도 김 목사는 틈만 나면 오 집사 칭찬 일색이었다. 성도와 목회자와 동역의 아름다움을 많이 보여주었다. 그의 은사에 대한 칭찬도 빠지지 않았다. 
 
"오 집사님은 교회 공동체와 교민사회를 위하여 자원하여 사역하는 중에 드러난 그의 은사들은 섬김의 은사, 가르침의 은사, 권면의 은사, 목회의 은사, 돕는 은사, 구제의 은사, 복음 전도의 은사, 남을 후히 대하는 은사가 두드러집니다."
 
 
거부할 수 없는 선교의 열정
 
이만하면 갖추어야 할 은사는 거의 다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에게는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거룩한 열정이 분출하고 있었다. 바로 '선교의 열정'이었다.
 
그의 처남 정태영 선교사가 12년째 태국 프라이 부족을 위해 사역하는 덕분에, 일본과 태국 등지로 단기선교를 떠나서 사람들을 치료하며 다녔다. 일본 6회, 중국 2회 , 태국 1회를 다녀왔다고 한다. 그러면서 일본에서 단기로 치료하는데 단기간에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 심지어 그에게 선교사로 와달라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그 말을 새겨 듣기도 했다. `이상하다 내가 선교를 할 사람인가? '를 몇 번이나 자문자답했다.
 
그러는 한편, 시드니 내 아프리카 수단교회를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그들의 허리를 치료해 주고,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일을 활발하게 했다. 가정을 개방하여 마음과 몸이 상한 사람들을 상담하고 치료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헌신의 결정적인 계기를 만났다.

"3년 전 샘의료선교 회원들과 함께 중국으로 갔습니다. 샘선교회에서 내 이이야기를 듣고 기도회를 인도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일 년 정도 기도하다가 그해 중국 단동 지역으로 단기선교를 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분들을 치료하면서 엄청난 뜨거움을 느꼈습니다. 눈물이 나면서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불일 듯이일어났습니다.
 
특히 북한에 가족을 두고온 탈북 동포들과 조선족들을 보면서 그들을 사랑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도 모르게. 2~3년 후에 새로 오겠다고 말을 했습니다. 박세록 장로님도 그때부터 기다리며 기도하셨습니다. 이곳 호주 샘 가족들이나 내 주위 사람들도 그곳에 갈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쨌든 1) 그들 영혼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느끼면서 2) 그들이 자신을 기다려주었고, 박세록 장로도 기다린다 하고 3) 선교를 언제 어디로 가느냐고 할 때는 우군자 선교사로부터 샘에 대한 소식을 구체적으로 들었다. 
 
"단동복지병원이 샘에서 단동에 지은 종합병원입니다. 100동이 넘고, 시설도 좋습니다. 그 병원을 재활정문병원으로 전환하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의 가치를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재활치료할 생각이 없고, 쓸모없으면 버리려고 합니다. 재활전문병원으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의료진을 확보해야 합니다. 그날이 빨리 와야 합니다." 
 
지난 송구영신 예배 때 그는 깊은 내적 확신에 붙잡혔다. '지금 이들이 너를 원한다'는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사실 하나님 앞에 그 말씀을 듣기 원합니다. 그래서 확인받기 원해 하나님께 아뢰었습니다. "주님, 제가 주택 융자금을 못내서 집이 없어져도 좋습니다. 우리 가족들을 주님께서 데려가셔도 좋습니다. 1불의 후원금을 주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결단했습니다."
 
10월 17일 큰 딸 결혼식을 앞두고 있고 또 재정적으로 아빠가 후원했으면 좋겠다 하여 출발을 연말로 생각하기도 했다고 하였다. 
 
 


▲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의료사역을 위해 중국으로 떠나는 오진백 집사     ©크리스찬리뷰
생명언어 치료연구소

 
그의 사역 가운데 3년 전부터 시작한 '생명언어 치료연구소'가 있다. 이 연구원은 상당히 행복하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예수님의 말씀을 닮기 위해 그분의 말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르치니 하나님의 삶, 예수님의 삶, 말을 배우게 됩니다." 멜본에서도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성경에 입각하여 가르치고 몇 달을 훈련하면 화목해지는 것이 눈으로 보인다고 하였다. 
 
`긍정, 위로, 칭찬, 격려'가 넘치는 훈훈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을 직접 경험하면서 선교 사역을 위해서 더욱 큰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호주에서 경험하고 쌓아온 그의 은사가 '우리의 땅끝' 단동으로 건너가 그들의 척추뿐만 아니라 마음과 영혼까지도 치료하는 큰 성령의 역사가 함께 하기를 기대해 본다.
 
 
글/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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