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을 가진 주지의 아들이 자라서 목사가 됐다? 그것도 대형교회 목사가...'
상당히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 만한 뉴스감이다. 간혹 승려가 목사가 되어 부흥회를 다니는 경우는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건강한 지역교회를 섬기기보다는 순회전도자, 혹은 간증자로 불려 다니는 ‘전국구’들이 대부분이다. 주지의 아들이 건강한 지역 교회, 모범적인 지역 교회를 이끌어가는 경우는 더더욱 희귀하다 못해 ‘기독교 인간문화재’감으로 등재할 만한 필요충분조건이 갖춰져 있다. 그 변화는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여 초대교회를 세우고 견인해간 바울의 ‘다메섹 변화’에 비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목회자가 우리 가까운 곳에서 20년이나 있었다. 시드니에서 가장 짧은 기간에 새순교회를 대형교회를 일으키고, 모범적인 지역교회로 섬겨오다 이번에 한국의 초대형교회라 일컬을 수 있는 수영로교회로 부임해가는 이규현 목사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제가 자란 고향인 부산은 굉장히 불교 배경이 강한 곳입니다. 범어사를 비롯하여 가까운 통도사, 해인사 등 대형사찰이 병풍처럼 둘린 곳입니다. 아버지가 절의 주지였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6학년까지 절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자연히 저는 강한 불교색채 문화 속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런 주지의 집에 어느 날 갑자기 극적인 변화가 찾아왔다. 이 주지의 집에 성령의 바람이 세차게 불어온 것이다. “초등학교 6학년 말부터 중학교 1학년 때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 속에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차마 개종은 못하고 허락한 상태였습니다. 일종의 항복이지요. 치과의사였던 작은 아버지께서 전도를 받으시고, 우리에게 전도를 하신 것입니다. 물론 처음에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강력하게 저희 가정에 개입하시면서 가정 전체가 개종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거부할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예수를 믿게된 ‘주지의 아들’은 그저 예수님이 좋았고 교회가 좋았다. 고등학교 때 미션스쿨에 진학하면서부터는 마치 물 만난 고기처럼 마음껏 ‘은혜의 바다’를 헤엄쳐 다니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들어가면서 ‘십자가의 예수님’을 본격적으로 만나면서 은혜생활을 체험했고, 고2 때는 신학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렇게 되자 그의 생활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동심원이 퍼져나가는 그런 삶이었다. 고등학교 때 이미 별명으로 ‘목사’란 타이틀을 걸었다. 개종과정에서 겪었던 아픔과 갈등과 상처가 많아서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 하나님께 매달리는 시간이 많았다. 고등학교 때부터 방학 때면 으레 기도원에서 들어가 일주일씩 금식을 할 정도였다. 특히 개종과정에서 가정이 굉장히 재정적으로 시련을 겪었다. 청소년 사춘기 때 이런 어려움들을 통하여 고난을 배우고 고난 속에서 영적인 훈련을 받게 하셨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회상했다. 특히 고등학교 때 개척교회 안에서 학생신앙운동을 하면서 신앙의 순수성을 경험한 것 같다고도 했다. 본질을 찾는 정기점검 그런 그에게 신학교 입학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거쳐야 할 통과의례였다. 신학교에 입학한, 80년 첫주일부터 교육전도사 생활을 했다. “신학하고 사역하는 가운데, 부산에서 3군데 한 사역지에서 좋은 경험들을 많이 쌓았습니다. 과거를 돌아보면 아름다운 추억만 있고, 아픈 경험이 없다는 것이 축복입니다. 하나님 은혜의 이면을 돌아보면 늘 아름답고 행복한 사역이었지요. 주어진 환경에서 최선을 다했고, 귀한 열매들을 본 것을 감사합니다.”
신학 초년병 시절, OMF 선교사 윌리엄 블랙 선교사 강해설교 훈련에 빠지지 않고 참여하여 많은 영향을 받았다. 또 당시 한국 교계에 <매일성경>으로 큐티운동을 일으키던 성서유니온 윤종하 총무를 많이 따라다녔다고 한다. “<매일성경> 훈련, 수련회뿐만 아니라 집필자로도 참여했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선교단체에도 눈을 떴습니다. 네비게이토 등에서 제자훈련의 ‘무브먼트’를 읽으면서 한국교회 필요를 보았습니다. 그 이후 <매일성경>과 큐티를 새벽기도에 접목하는 등 한국교계에 큐티를 보급하는 일에 열심히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옥한흠 목사님의 제자훈련과 평신도 훈련에 눈을 뜨고 그분들과 교제 나누면서 목회적인 안목을 길렀습니다.” 이렇게 그는 신학교 교육전도사 시절부터 한국교회 목회에 분명한 목표를 세웠다. 목회적 관점에서 교회론을 섭렵하기 시작했다. 교회론에 관한 책을 많이 읽고 한국교회를 돌아보면서 좋은 교회를 살펴보며, 목회 비전과 철학을 키웠다. 현실 교회의 유약함, 현실교회의 한계들을 안타깝게 바라보며 눈물도 많이 흘렸다. 그러면서 그는 ‘방법론도 중요하지만, 방법론을 다루는 사람이 바로 설정되어 있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책도 읽고, 한국교회 동향을 보며, 자동차도 정기 검진해야 하듯이, 항상 자신을 정기 검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정기검진을 하지 않고 한참 지나다 보면 좀 엉뚱한 쪽으로 와있다는 것을 잘 모릅니다. 설교 패턴도 하나님 말씀의 중심부도 건드리지 않고, 산만한 주변 주제를 다루기 쉽고요. 복음의 핵심이나 사람을 움직이는 것을 다루기보다 주변의 이야기를 많이 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내 삶 속에서 달라붙은 생동감있는 메시지가 아니라, 내 삶과 이원화되어 있는 것을, 열정을 가졌지만 사변화, 정형화 되어서는 복음의 폭발력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교회를 움직여나가고, 성장을 추구해 나가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나가고, 영적 식성이 왕성하니 끊임없이 빨아 당기니, 복음의 피상성, 사변화된 지식의 전달, 삶과 유리된 존재론적, 하나로 통합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후 그는 목회현장에서도 계속 방법론적인 문제가 아니라 원론적인, 본질적인 부분에 접근하는 목회하기 위해 계속 정기 점검해 왔다.
“목회자가 누구인가? 하나님과 통합적인 일을 하지 않으면 사역과 삶이 유리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모두가 겪고 있는 문제이지요. 지금 보는 책들도 목회 방법론이 들어오지 않고, 재미도 없고, 집중해서 보는 책들의 대부분은 원론적, 본질적 핵심에 관한 하나님에 관한, 메시지의 흐름을 다시 되잡아 터닝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면서 느낀 것은 늘 자신을 정기점검하지 않으면 ‘목회가 하나님의 일이라는 생각보다 내 일이지 하는 생각, 하나님 중심보다 목사 중심의 자기 일, 철저히 인간화된 목회, 기도해도 목회를 이뤄내기 위해 하나님을 동원하는,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일을 많이 하고 있지 않은가?’하는 함정에 빠질 위험성에 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수영로와의 만남 특히 이번에 부임하는 수영로교회는 신대원 졸업과 동시에 교구를 맡아서 전임사역을 시작한 곳이다. 그해 가을 강도사가 되면서 결혼을 한 곳이기도 하다. “수영로가 부흥하는 교회로 떠오를 때인 86년 1월입니다. 정필도 목사님께서 75년도에 개척하셨으니 10년 정도 되었을 때입니다. 서울 분이 부산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실 부산은 전국적으로도 기독교가 굉장히 열악한 도시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범어사, 통도사, 해인사 등 대표적인 불교 사찰들이 부산 경남권에 포진해 있고, 일본 문화가 좋지 않는 문화가 들어와 있는 곳입니다. 항구도시라 전국에서 카바레가 가장 많은 도시지요. 또 상업도시라 쉽지 않은 사람들이 모인 도시입니다. 교계상황은 아주 ‘율법적’이었고요.
이런 척박한 부산 땅에서 뭔가 한계를 뛰어넘어 헌신하는 목사님을 보고 크게 감동했습니다. 저 역시 힘닿는 때까지 열심히 섬기면서 행복하게 사역했습니다. 제 목회의 상당한 부분과 미래목회의 중요한 부분들을 그곳에서 경험했습니다. 부흥하는 교회의 한가운데 있어본 것은 큰 축복이지요. 목회중심의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생명을 건 목회적 투혼을 곁에서 지켜본 것이 큰 특권입니다. 좋은 교회문화 속에서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전임사역의 황금기간 5년을 수영로에서 한 것이 큰 축복입니다.” 그는 수영로에서의 사역은 축복이었다고 몇 번이나 반복해서 말했다. 좋은 멘토와의 만남 속에서 평생 목회철학과 목회의 골격을 형성한 곳이기 때문이리라. 처음 전임사역을 한 곳인 만큼 첫사랑의 애정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거기에다 선배의 소개로 몇 개월 교제하다가 백년가약을 맺은 곳이기도 하다. “결혼하기 전부터 막상 소개는 받았지만 데이트도 많이 못했습니다. 사역이 굉장히 많아서였습니다. 교회행정도 맡으면서, 한 주간에 성경공부 지도자 그룹 7군데 인도하고, 10가정 심방 할 정도였으니 일 속에 파묻혀 지냈습니다. 교회 일에 바빴지만 일을 좋아했습니다. 사실 수영로도 허니문 기간이었고, 제 가정도 신혼이었는데 아내와 좋은 시간을 많이 못가졌습니다. 그러다가 호주로 오면서 아내와 좋은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5년 동안 진액을 수영로에서 쏟아내고, 미래 목회를 위한 새로운 전환점을 갖게 되었다. “기도하는 가운데 호주에 있던 선배 한 분이 ‘호주에 오면 좋겠다’ 했습니다. 미래목회를 위해 준비하는 가운데 2~3년 정도 계획하고 가볍게 호주에 왔습니다. 영어도 익히고, 영어권에서 해외문화 경험과 안목, 영어권의 책들을 접하면서 목회적 소양을 넓히는데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수영로교회는 만족도도 높았고, 굉장히 편안하고, 좋은 조건이었습니다. 해외로 불쑥 오는 것은 광야로 온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진반섭 장로와의 만남, 하나님의 음모 그리하여 90년 12월 15일 시드니에 도착했다. 그렇게 도착한 시드니에서 우연 같은 작은 섭리가 일어났다. “91년 1월 1일 총영사관 대회의실에서 신년하례회가 있었습니다. 그곳에 시드니 교민 지도자들 모였는데, 그날 영문도 모르고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시드니 CBMC(기독실업인회) 성경공부를 인도하면서 교민들과의 접촉점이 있었습니다. 그 외는 91년 첫주부터 호주장로교회인 에핑교회를 다니기 시작하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개척 제의를 여러 군데서 했지만 전부 거절했습니다. 이민목회를 생각한 것도 아니고, 2~3년 생각하고 왔으니 말입니다.” 이때 진반섭 장로와의 ‘특별한 만남’이 일어났다. “진 장로님이 처음에 요청하셨을 때 거절하니 그냥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오후예배 한번 드려달라고 하세요. 그래서 그날 저녁 진 장로님 댁에서 진 장로님과 도 장로님, 두 가정이 드렸습니다. 두 번째 낮에도 드렸고, 세 번째 가니 예배대열로 앉아계시더라구요. 같이 밥 먹고 교제를 나누고 왔습니다. 처음엔 선을 분명히 그었습니다. 교회와 예배를 원하는 그분들을 처음엔 순수한 마음으로 섬기다가 어느 정도 모이면 목회자를 청빙하기에 좋지 않겠느냐며 목회를 돕는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자꾸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하니 진 장로님 가정에서는 더 이상 드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다니던 에핑장로교회 친구에게 이야기했더니 안쓰고 있던 교회 별관을 빌려주었습니다.” 그리하여 92년 3월 마지막 주일 드린 예배가 설립예배가 되었다. 새순교회 이름은 미리 지어놓은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설립예배를 드렸어도 자신은 새순교회 담임목사가 되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저는 계속 ‘목사님을 구하십시오, 저는 아닙니다’라고 공식 비공식적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도 계속 사람이 모이기 시작하니 걱정이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여기 붙들릴 것 같다’는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제가 이민교회에 대해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저는 한국교회 목회를 분명히 갖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기도하는데 자꾸 예상치 않는 부분으로 진행되는 겁니다. 아마 저에게 한국교회는 생각도 하지 않도록 바람 빼는 ‘하나님의 음모’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수요기도회에 ‘이민자에 대한 눈물’을 가슴깊이 새기게 되었습니다. 너무 많은 아픔과 방황하는 영혼들, 이 이민의 땅에 필요하다는 부르심이 있다면 순종하겠다는 결단을 했습니다. 하나님께 순종하겠다는 결단을 했지만 여전히 아픔이 있었습니다. 제가 가진 꿈과 비전을 꺾어야 했으니 말입니다. 당황했습니다. 하나님 여기서 해야 합니까?” 그렇게 순종을 결단하고 나자 소위 ‘만사형통의 비단길’이 깔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고난의 가시밭길을 먼저 경험해야 하는 상황이 도래했다. “신분 문제 때문에 한국으로 가서 비자 신청을 해야 했습니다. 그때가 교회 설립된 지 11개월, 마치 신생아를 떼어두고 떠나는 어미의 마음이었습니다. 100명 정도 되었을 땐데, 진행과정이 의외로 20개월이 걸렸습니다. 교단에 속하지도 않은 작은 교회 하나가 목사를 위한 스폰서십이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 예가 없었고, 독립된 교단으로서의 면모를 서류상 만드는 준비하는 작업이 오래 걸린 것입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교회는 목사 없이 20개월, 목사는 교회 없이 20개월’을 견디고 버텨야 했다. 떨어져 살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해야 하는 신혼부부의 사정과 다르지 않았다. 서로에 대한 약속과 그리움으로 사랑은 농익어갔다. 약속과 신뢰로 세워진 교회 “교회나 저에게나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한국에서 오랫동안 호주로 못돌아가니 부모님들까지도, ‘한국에 있지 왜 가려고 하느냐?’고 해요. 한국에서 이런저런 유혹도 많았고, 목사 없는 교회 역시 주변에 루머들도 많으니 어려움이 컸습니다. ‘교인이 다 떠나가도 돌아가려고 한다’는 교인들과의 약속을 지켰고, 교인들 역시 약속을 잘 지켜 주셨습니다. 이처럼 우리 교회는 서로에 대한 ‘약속의 관계’를 잘 지켜준, 기본적인 신뢰를 기초로 하고 세워진 교회입니다. 교회가 20개월 동안 목사 없이 지내려니 얼마나 어려운지 일부 떠나간 사람도 있고, 새로 등록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목사가 돌아온다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희망이 이루어졌습니다. 94년 10월에 돌아왔습니다.” 그때부터 새순교회는 봄날을 맞이했다. 추운 겨울은 지나가고 봄이 오면서 새로운 ‘새순’들이 우후죽순처럼 돋아나기 시작했다. 새가족이 오면서 교회가 눈에 보이게 바르게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고 하였다. “굉장히 가물어 메말라 있던 땅에 비가 쏟아지니 스폰지처럼 빨아당기는 것과 같았습니다. 담임목사 없이 20개월 기다려오면서 교회도 갈급한 상태에서 만났습니다. 저도 백수로 있다가 갈급한 상태에서 오니 굉장한 스파크가 일어난 것입니다. 마치 기름에 불을 붙인 것처럼, 불꽃 점화되면서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에핑교회 별관 300석이 일 년 남짓에 꽉 찼고, 체틀렘 하이스쿨도 꽉 차는 등 무서운 속도로 번져가는 불길 같았다. 건물 없이 학교 건물을 계속 빌려쓰다 보니, 학교 사정에 따라 건물 없이 많이 옮겨 다녀야 했다. 어떤 때는 매주 예배 장소 옮겨 다니니 주일예배 한번이라도 안하면 어디로 옮겨가는지 모를 정도였다. 초창기부터 새가족공부를 시작하여 교회비전과 철학과 비전을 분명히 짚어갔다. 복음의 기본부터 시작하여 제자훈련으로 평신도 훈련을 다져가는 교회를 세우고자 했다. 신학교 시절부터 준비한 본질에 충실한 목회를 정기점검하며, 복음으로 끊임없이 담금질했다. “복음은 언제나 우리의 가슴속에서 신선하게 다가올 수 있는가가 중요한 주제입니다. 초창기부터 빠짐없이 다룬 주제가 복음의 문제입니다. 목회하다 보니, 복음적으로 가지 않고 율법적으로 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한계이지요. 복음을 깊이 다루지 않을 때, 복음 안에서 감격하고 흥분하고 미치지 않을 때, 저 자신이 율법적이 되고, 경직되고, 식어지는 모습들을 보았습니다. 복음이 약화될 때 과대포장이 일어나고, 내용이 부실할수록 포장이 화려한 것도 알았습니다. 좋은 물건은 광고 없이도 팔리지 않습니까? 광고를 많이 포장할수록 내용이 부실하고, 사기성이 농후하고 말입니다. 복음이 약화될수록 복잡해집니다. 종교적 소비자들을 속이고 있는 것이지요, 복음의 실체를 드러내면, 포장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설교도 내용이 충실하고, 복음 안에서 안정돼 있으면 살살 해도 됩니다. 준비 안됐을 때 소리를 많이 칩니다. 잔잔하게 설교하는데도 콱콱 치는 설교는 자신의 삶과 복음이 일치되었을 때입니다.” 본질로, 복음으로! 복음을 계속 들어도 뻔한 내용이 아닌, 식상하지 않고 신선하게 드려지도록 했다. 성도들이 복음 안에서 건강한 만족을 얻고, 영적 건강을 유지하고, 복음 안에서 자신감을 갖도록 하는데 진력했다. “목사가 복음을 경험하면 자신의 연약함들도 솔직히 드러냅니다. 자기기만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의 약함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합니다. 열 받고, 변증적 설교를 많이 하지요. 자기를 옹호하다 보니 복음의 변증이 아닌 자기변호 자기방어 자기정당화, 자기변증이 심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나 복음을 정확하게 경험하면 자기 인정, 자기 경험, 자기의 연약함을 드러내는데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복음이 얼마나 영광스러운가를 표현해낼 수 있을 때, 희망을 갖고, 은혜를 나눌 수 있습니다.” 복음에 충실하지 않을 때 ‘희생증후군’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경험적으로 설명했다. “복음이 약화되면 그때 희생증후군이 찾아옵니다. 생각만큼 교인들이 나를 대우해주지 않는다고 섭섭해집니다. 세월이 흐르다 보니, 그 마음을 주체하기 어려워집니다. 그렇게 되면 가시 돋친 말들이 나옵니다. 복음을 설교하는데 율법이 나옵니다. 내용은 복음인데 전달자는 율법적이지요, 그러면 교인들은 상처를 받습니다. 복음은 가시가 아니라 사랑인데 말입니다.”
숫자가 몇 명이든지 뿌리가 없는 것이 이민교회인 것을 절감한 그는 이민자들의 마음, 이미자의 현실을 직시했다. 그리고 복음으로 치유되기를 바라면서 매주일 복음으로 설교했다. “이민자들은 빨리빨리 피로감을 갖습니다. 상처가 많습니다. 교인들을 회복시키는 일은 복음의 그 풍성함 속에서 끌어안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이 약화될 때 목회 기술을 자꾸 터득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자꾸 갈수록 기능화되어 갑니다. 영성이 깊어지지 않으면 테크닉으로 가기 쉽습니다. 익숙해진 테크닉으로는 교회 운영은 되지만 영성이 없습니다. 교회를 ‘운영’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면 상업적, 세속화와 생존의 원리가 들어오게 됩니다. 영혼을 다룬다는 개념이 없습니다. 그러면 목회자 정체성의 문제가 생깁니다. 복음을 세련된 자기 기술로 ‘유통’하기 쉽습니다. 이 점을 명심하고 저는 복음을 뜨거운 심장에 담아서 날마다 새롭게, 계속적으로 새롭게 하는 작업을 하려고 했습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놀라운 세계를 설교와 말씀을 통해 나눌 때 목사 자신과 회중이 복음의 세계 안으로 빨려 들어가, 그 세계 안으로 잠겨있는 복음의 진리를 선포하는 우리에게는 굉장한 도전입니다. 복음의 해설가나 설명자가 아니고 기가 막힌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경험이고, 충분히 담금질했느냐의 문제입니다. 십자가 복음과 그 능력이 사로잡는다면 목회 성공같은 주제는 아무 의미 없는 난외의 것입니다. 그것이 목회자 삶의 주제가 될 수 없습니다.”
이 목사는 사역과 자신의 삶이 격리되어 통합되지 않을 때가 가장 고민된다고 하였다. 특히 자신이 ‘노력하고 충성하는 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더 알아가고 나 자신은 십자가 안에서 자기실현을 겪고 있는가? 내 영혼의 내면세계는 전혀 방치되어 있지 않은가?’하는 것을 정기점검한다고 하였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 속에서 일어나는 충성함이 없는 척박한 기계적으로 돌아가는 이중적인 생활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허무 속에 절망하다가 결국 부도나고 말지요. 큰 교회 목사들요? 세상적으로 말하면 성공했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죽을 지경입니다. 자기 기쁨이 없이 끌려가고 있는 경우도 많거든요. 삶은 날마다 쫓기며 기능적으로 수행하고, 의무적으로 만나고, 날마다 장례식에다 자기 감정관리하랴, 성도들의 고통에 감정이입을 할 수 없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그럴수록 복음의 광휘함에 잠겨있어야 합니다. 주일예배 설교 때 복음을 제 얼굴에 그려놓으려고 했습니다. 교인들이 와서 목사 얼굴 보고 기도제목 하나 더 생기면 안되지 않습니까? 지난 20년 동안 새순교회에서 복음을 증거하면서 너무 행복했습니다. 강단에 선 자체가 너무 행복해서 죽어도 좋다는 행복감, 행복의 충만함에 잠겼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훈련과 보람으로 세워진 교회 복음을 기다리는 성도들을 위해 이 목사는 월요일부터 설교준비를 한다. 수요일 정도까지 다른 책을 참고하지 않고 본문과 씨름한다. 목요일부터는 살을 붙이는 작업을 한다. “제일 중요한 것은 본문과 씨름하면서 영감을 받는 것입니다. 제 영혼에 꽂히는 하나님이 주시는 인사이트를 받는 것이지요. 매주 초에 기본적인 것이 완성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화·수·목 주중에 오전은 설교를 위해서 모든 시간으로 할애합니다. 금요일이면 완성합니다. 토요일이면 문장 다듬기를 합니다. 군더더기를 빼고 워드 플레이를 합니다. 제가 설교를 잘하지는 못하지만, 설교의 기본적인 신조와 철학은 정성들여서 성도들에게 전하는 ‘성실한 준비’입니다. 준비과정에서의 성실함과 선포하면서 전달하려는 열정입니다. 단순한 전달이 아니라 제 삶의 무게를 실어서 한 영혼이라도 그 말씀을 통해 은혜 받고 몸부림치는 파토스가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매일 새벽기도 마친 후에는 줄곧 교회에 12시 30분까지 머물며(이때는 거의 어떤 약속도 잡지 않는다고 한다) 본문과 씨름하며 설교준비를 한다. 인터뷰한 그날도 아가서를 강해하는 중이라며 책상 위에는 각종 주석서들로 가득했다. 오늘의 새순교회는 복음설교 하나로 이루어진 교회는 물론 아니다. 무엇보다 탄탄한 교육과 훈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비자를 받고 귀국한 이듬해부터 바로 제자훈련에 들어갔습니다. 초창기 모든 리더십들이 1기 출신들입니다. 처음부터 제자훈련 시작하고 큐티를 했습니다. 온 교인들이 다하고 새가족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새순교회의 기본적인 정서는 훈련 받고 일하는 방식을 익히고, ‘하나님과 목회자와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 훈련사역은 교회의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는 훈련의 위대한 힘을 예시했다 “새순교회가 그동안 분열 등으로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나, 또 그럴 만한 똑같은 요인과 문제들이 있었을 것인데도 빨리 안정되고, 빨리 정리되는 것은 훈련의 힘이라고 봅니다. 문제화되지 않고 빨리 정리되지요, 기도하자 하는 분위기로 가는 것이 대세입니다. 교회는 문제보다 더 큰 은혜의 파도가 치면 다 덮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목회의 본질적인 것 외에 이슈로 인간관계로 시달린 경험이 없는 것은 당연했다. “목회의 코드는 교인들에게는 없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문제든지 모든 문제는 목회자에게 찾고 싶습니다. 은혜를 못받는 교인이 안타까운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설명해내지 못하는 목회자의 문제이고 한계입니다. 그들을 포용하지 못하고, 못받아주는 목회자의 문제입니다. 교인은 다 순한 양들입니다. 목회자는 언제나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가니 이제까지 교인들과의 싸움은 없었습니다. 이해 못하면 좀 기다리면서 속도를 조절하면 되었습니다. 사역 하면서 어려운 것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 목사는 자연히 성도들이 이민자의 삶 속에서 방황하고 힘겹게 살아가다가 삶의 길을 찾는 것에서 목회 보람을 찾았다. “교인들이 ‘아, 내가 사는 이유가 있네! 목적이 있네!’하며 이민의 땅에서 희망을 찾고 길을 찾고,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고 길을 찾는 것! 교인들이 복음 안에서 치유되고 변화를 경험하는 것, 얼굴이 바뀌는 것, 기쁨을 찾고 삶의 의욕을 갖고 행복감을 느끼고 너무 편안하게 삶의 행복을 찾는 것... 이런 것들이 보통의 것들이 아닙니다. 사람의 변화가 가장 큰 경험이요 보람이었습니다. 그걸 눈으로 확인 못했으면 아마 목회를 못했을 것입니다.” 전환의 시대에 이처럼 ‘복음과 훈련이 이끄는 목회’는 여러 면에서 열매로 나타났다. 특히 건물과 얽힌 이야기도 곁들였다. “2000년 말 메도뱅크 건물을 구입했습니다. 강변에 위치한 아름다운 건물이었지요. 구입하고, 건축 허가를 받고 난 다음 새롭게 지을 즈음에 고민이 생겼습니다. 제 안에 일 년 정도 기도하고 고민했습니다. 크리스찬 스쿨과 지역사회를 섬기는 일을 계속 마음에 비전으로 품었습니다.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메도뱅크 건물은 매각하고 노스록스에 25에이커 정도 땅을 마련했습니다.” 그동안 공동체가 건물을 추구하지 않고, 건물보다 사람을 중요하게 다음 세대를 일으키는 비전 가운데 자연스럽게 노스록스으로 가는 것이 이루어졌다고 했다. 단순히 예배공간의 확장 개념이 아니고 지역사회, 한인교회, 디아스포라 호주 사회를 섬기기 위한 센터로 바라보게 되었다고 하였다. “노스록 이후 새순교회는 새로운 전환의 시대를 맞게되는 새시대가 열립니다. 새 시대엔 새로운 리더십은 저보다 더 적임자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건물보다 더 중대한 문제입니다. 하나님 보여주신 그림, 10년, 20년 바라볼 때, 제가 주도적으로 하기보다 새로운 리더십에 맞는 건축을 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그토록 성전에 대한 소망이 있었던 다윗처럼 성전 지을 준비를 다 해둔, 이 목사! 그는 20년을 하루같이 선겨온 공동체를 떠나는 새로운 부름을 받았다. 처음으로 전임 사역을 했던, 첫사랑이 깃든 곳이다. “굉장히 어려운 결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가장 힘든 것은 새순교회의 미래가 부담이었고, 걸림이 되었습니다. 그 부분에 대한 확신을 얻기까지 기도를 시작하고 응답된 것이 많습니다. 새순의 미래에 대해서 지금 저의 결정이 유익이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한 마음의 평안이 왔습니다, 반드시 유익한 일로 이끌 것이고, 건축도 결단코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도해 오신 것, 이 단계를 뛰어넘기 위한 공동체적인 믿음의 훈련을 보여주셨습니다. 다음 세대를 여는 리더십의 필요성, 가슴에 20년 전에 조국 교회를 섬기고자 하는 그 꿈을 다시 되살려주신 하나님, 제 가슴속에 불 같이 일어나는 한국교회의 미래, 기울어져 가는 한국교회를 밖에서 바라보면서 나름대로 진단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미력하지만 어떤 역할을 감당하기를 원하신다는 감지했습니다. 특별히 한국에서 기독교의 실추된 이미지 리메이크, 대형교회가 갖고 있는 대사회적 책임, 연약한 교회들과의 관계, 롤모델을 찾는 것, 다음 세대인 젊은이들을 다시 일으켜야 하는 등등의 중요한 토픽들을 고민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립니다.” 비록 한국으로 사역지는 옮기지만 20년의 삶, 젊음의 인생 노른자를 녹였던 새순 공동체와 이민교회는 그에게 잊을 수 없는 좋은 네트워크를 통해서 기여하고 싶은 마음, 계속하여 호주 한인교회들과 새순교회와 연계하여 아름다움 발전이 있기를 기대한다고 하였다. 송기태|크리스찬리뷰 편집국장, 두란노교회 담임목사 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저작권자 ⓒ christianreview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