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종이 위에 검은 글자로 만든 교회

엄상익/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4/07/19 [20:43]
30대 초반시절 정말 부러운 고교동창인 친구가 있었다. 미남인 그는 남을 배려하는 부드러운 인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금숟갈을 입에 물고 태어난 축복받은 인생 같았다. 집안은 재벌급이었고 아버지는 장관이었다. 미녀인 누나는 대한민국 최고 재벌총수의 부인이었다.
 
그런 운명의 비결은 무엇일까 궁금했다. 그는 내게 재미있는 비밀을 하나 말해 주었다. 불경이든 성경이든 경전이란 단순한 책이 아니고 그 안에 신비한 기운이 서려 있다는 것이다. 어떤 경전이든지 차에 놓고 다니면 사고도 막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내게 성경을 읽지 않더라도 차에 두고만 있으라고 권했다. 좋은 집안에 태어나는 행운이 있듯이 하나님이 주는 축복은 사람마다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것 같다.
 
삼십대 중반 안개 같은 황사가 진주해 있던 봄날이었다. 사무실에 있는 데 뜬금없이 성경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교회에 다닌 지 몇 년이 됐지만 성경에는 무심했다. 십분쯤 흘렀다. 내면에서 누군가 지금 바로 나가 성경을 구하라고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쓸데없는 생각을 지워버리려고 했다. 퇴근할 때 서점에 가서 한 권 사가지고 가면 됐다. 굳이 업무시간에 갈 필요가 없었다. 다시 십분쯤 흐른 느낌이었다. 이번에는 의자 등받이 쪽에서 어떤 존재가 나를 확 밀어냈다. 시키는 대로 하라는 명령 같았다. 속에서 불이 붙은 것 같았다. 나는 급히 주차장으로 내려가 차를 몰고 광화문 네거리의 서점을 향했다. 일분일초가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무엇에 씌워 다급해 진 나는 길가에 차를 버려 둔 채 지하서점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성서코너에 갈색표지의 두툼한 성경 한 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날부터 나는 탐식하는 짐승처럼 성경을 읽기 시작했다. 내가 읽는 게 아니었다. 다른 어떤 존재가 내 목을 비틀어 잡고 읽게 하고 있었다. 그 존재는 나를 성경 속 광야와 들판으로 내몰고 있었다. 그렇게 삼십 번 쯤 읽었을 때였다. 마음속에서 이상한 감동이 왔다. 사표를 내라는 것이다. 내면에 있는 존재는 이제 나보다 한 발 앞서 나를 끌고 있었다. 조그만 개인법률사무소를 차렸다.
 
성경은 하나님이 내게 보낸 편지였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할 것 없다고 했다. 스스로 머리털 하나도 희게 하거나 검게 할 수 없고 그 숫자가 얼마인지 스스로도 모르지 않니? 라고 미약한 내 존재를 알려주기도 했다. 그러면서 아무 걱정을 하지 말라고 했다. 하나님의 편지인 성경 속에서 배웠다는 놈들이 이 내용을 보면 넌센스라고 비웃고 아무리 지식이 많고 똑똑하다는 놈들도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했다. 그러나 믿는 사람에게는 놀라운 기적의 힘이 될 것이라고 직접 말해주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이었다.
 
사십대 중반쯤 갑자기 하나님이 의사를 통해 암이라고 겁을 주었다. 참 힘들게 하시는 인생이란 생각이 들었다. 어려서부터 고생고생 시키더니 이제는 데려가겠다는 것이다. 언젠가 가긴 가지만 아직은 아닌 것 같았다. 우연히 입원환자들을 위문하기 위해 온 사람이 있었다. 탈랜트 정영숙씨였다. 그녀는 성경을 한 장 한 장 뜯어가지고 다니면서 길을 갈 때도 사람을 기다리는 시간에도 읽는다고 했다. 암이라고 해서 동맥 정맥을 다 끊어버리고 오장육부 중의 하나인 쓸개를 빼냈는데 살펴보니 암이 아니더라고 했다. 나는 용궁으로 끌려가 간을 빼앗긴 토끼신세가 됐다. 하나님이 쓸개 쏙에 들어있던 탐욕을 빼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다음부터 나는 읽던 성경을 복사해서 길에서도 또 변호사로 재판을 기다릴 때도 중얼거렸다. 겁나는 소리도 있었다. 성경을 백 번 읽으면 미치고 천 번을 읽으면 종교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백 번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직접 종교를 만든 괴물을 만나기도 했다. 오십대 초쯤이었다. 유명한 이단 교주를 상대로 소송을 벌이게 됐다. 그 이단 교주는 무학의 시골 머슴 출신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어려서부터 나무하러 갈 때도 달밤에도 비가 오는 날도 성경만 읽었다고 했다. 그러다 서른 살이 넘는 어느 날 마침내 산 위에서 기도하다가 어떤 존재의 음성을 들었다고 했다. 그 존재는 그에게 바로 그 산 아래 너를 숭배하는 수십만 명이 몰려올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여자를 너에게 주겠다고 약속했다는 것이다. 그의 강한 염원이 이루어지는 걸 봤다. 그는 이단의 교주가 됐다. 국내외의 수십만 신도가 그를 찾아왔다. 그가 숨을 한번 불어넣은 물은 비싼 가격으로 팔렸다. 그는 신도인 수많은 여자들과 관계를 가졌다.
 
나도 어느새 성경을 읽은 게 백번이 되어 가고 있었다. 나는 교주에게 그가 만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탄 같다고 했다. 성경에서 자기 앞에 무릎을 꿇으면 이 세상의 모든 영광과 권세를 주겠다고 유혹한 건 바로 마귀였기 때문이다. 예수는 태어날 때도 말똥냄새가 나는 구유 위에서였다.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둥지가 있지만 예수는 머리 둘 곳이 없었다. 성경은 어느새 나를 미치게 했는지도 모른다. 영혼의 본질이 바뀌어 있는 것 같았다. 전에는 경쟁자를 물리치고 사닥다리 하나라도 올라가려고 몸부림쳤다. 그러나 이제 나는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좀 더 잘 먹고 잘살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는 매일 일용할 양식을 주면 그 정도로 만족하겠다고 하고 있었다. 높은 지위가 아니라 성경을 흥미롭게 읽고 또 읽는 게 축복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내게 성경읽기는 영혼 속에 성전을 짓는 일이었다. 굳이 세상에 건물을 지을 필요가 없었다.
 
한 귀절 한 귀절 읽는 게 벽돌 한 장 한 장을 쌓아올리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수가 말한 성전은 그 자신의 몸이었고 성전의 재건은 부활을 의미했다. 나는 성경과 함께 세월의 강물을 타고 흘러갔다. 나는 삼십대 중반에 산 성경을 항상 보물같이 가지고 다녔다. 여행을 갈 때도 그 성경이 들어있는 배낭의 한 칸은 나의 지성소였다.
 
블라디보스톡에서 기차를 타고 시베리아를 횡단하다가 어느 역에선가 기차를 놓치고 망연자실한 적이 있었다. 텅 빈 대합실 나무의자에 앉아 나는 성경을 읽었다. 성경은 걱정을 쫓아내고 마음의 평안을 주었다. 어느 날 혼자 집에 있는 데 앞집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소방서 차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려왔다. 불이 옮겨 붙을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나는 평소에 귀중품을 어디 두는 지 무관심했다. 급하게 아내에게 전화를 해서 챙겨 가지고 나가야 할 게 뭐냐고 물었다. 아내는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조금은 허탈했다. 결국 내가 가지고 나갈 건 손때 묻은 성경 한권이었다.
 
어느새 오십대 말이 되었을 때였다. 우연히 유명한 강태기 시인과 만나는 인연이 있었다. 시인 강태기는 십대 소년시절 공장에서 일하면서 두 개의 신문사 신춘문예에 당선된 천재였다. 그런 사람이 문단역사에서 최인호씨를 포함해서 서너 명에 불과했다. 그런 시인의 말년은 비참했다. 달동네 임대아파트에서 혼자 폐암이 고통과 싸우고 있었다. 동네 중학교식당에서 남은 누룽지를 보내 줬고 또 성당에서 나물 같은 반찬을 가져다주는 생활이었다. 자원봉사자들이 이따금씩 목욕을 시켜준다고 했다. 그런데도 시인의 영혼은 행복이 충만했다. 창밖에 올라오는 호박꽃에 맺힌 영롱한 아침이슬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른다고 감탄을 했다. 시인은 내게 이런 말을 전해 주었다.
 
“젊어서 내공을 쌓으려고 바람처럼 흘러 다녔어요. 인도여행도 하고 수많은 책을 읽었죠. 글은 육십부터 본격적으로 쓰려고 했어요. 그런데 막상 나이 육십이 되니까 죽음의 천사가 가자고 왔네요. 그래서 그동안 모아두었던 책을 다 정리하다가 죽기 전까지 옆에 두고 읽을 게 뭘까 생각해 봤어요. 그랬더니 그게 성경이더라구요.”
 
나는 죽어가는 시인으로부터 큰 선물을 받은 느낌이었다. 그가 누워있는 자리 옆에는 십자가와 낡은 가죽장정의 성경이 놓여 있었다. 그는 죽어서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나무 아래 있다. 나와 함께 살아온 성경도 어느새 30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표지에 주름이 생기고 귀퉁이가 찢겨 나갔다. 성경은 나의 디엔에이를 바꾸어 놓은 것 같다. 가진 것으로 만족한다. 그럼 부자 아닌가. 성령이 내면에 들어와 나와 함께 있다. 그러면 나야말로 세상에서 누구에게도 기가 죽지 않는 가장 강한 자가 아닐까. 죽음도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영원한 생명의 길로 가는 통로를 안내해 주고 있으니까.
 
엄상익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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