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과 시

엄상익/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5/04/27 [10:19]
바둑판을 샀다. 젊어서 못 배운 바둑을 환갑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책을 놓고 끙끙거린다. ‘빵 때림’이라니 도대체 무슨 말인지 바둑 용어를 모르겠다. 바둑방송은 해설하는 사람들의 말이 외국어 같다. 인터넷 사이트에 가입해 18급이라고 하고 같이 둘 사람을 기다렸다. 아무도 상대해 주지 않았다. 사무실 근처의 동네 영감들한테 바둑을 배우기 시작했다.
 
환갑에 시작한 놀이가 또 하나 있다. 집안에 뒹굴던 오래된 시집을 발견했다. 곰팡이가 피고 누렇게 변색된 문학 전집 사이에 끼어있던 ‘52인시집’이었다. 1967년 발행한 책이다. 회사원이던 아버지는 배고픈 문인이 월부 책을 가지고 오면 거절하지 못했다. 그때 그 시집이 끼어들어온 것이다. 그 시들은 서가 귀퉁이에서 46년 동안 묵묵히 누군가 읽어주기를 기다려 왔는지도 모른다.
 
나는 두껍게 낀 먼지를 털어내고 마른걸레로 닦은 후 그 시들과 만나고 있다. 결핵을 앓던 구상 시인은 이중섭이 돈이 없어 종이에 그려온 복숭아를 받고 허허 웃고 있다. 일자리가 없던 그 시절 오 원짜리 국수로 점심을 때우고 사직공원 벤치에서 오후를 지내던 시인들의 모습이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시 속에 찍혀 있었다.
 
박인환 시인의 ‘목마와 숙녀’도 있었다. 시인이 가장 사랑하던 아들이 나와 경기중학교를 같이 다녔는데 전혀 몰랐다. 밴드반에서 시인의 아들은 트럼본을 불고 나는 옆에서 드럼을 쳤었다. 같이 중국음식점에서 자장면을 사먹었다. 시인의 아들인 줄 알면 더 존경해 줬을텐데.
 
시란 이런 것이었나 깜짝 놀란다. 화가가 물감을 빚어 새로운 색깔을 만들 듯 시인들은 사유와 이미지를 섞은 언어를 도모하고 있었다. 시어들은 투명한 색색의 보석 같았다. 나는 시를 공부하고 있다.
 
성경 속의 시편은 인생 칠십 년이고 건강해야 팔십 년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인생 나머지 10년을 어떻게 하면 의미 있게 살까 환갑을 맞으면서 내게 던져진 화두였다.
 
금년 초 나는 광야로 나갔다. 두툼한 타이어의 소형트럭 토요타 타코마를 빌려 이스라엘 민족이 가던 광야길을 따라 북상했었다.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건너 38년 동안 숙영을 하던 붉은 모래바다인 미디안 광야에서 지평선에 떨어지는 불덩어리 같은 해를 보면서 낙타를 타고 갔다. 그들이 숙영하던 오봇광야의 바로 그 자리에서 무교병과 우슬초로 저녁을 먹었다.
 
나는 달빛에 일렁이는 싯딤나무 그림자를 보면서 틀에 박힌 삶의 굴레에서 거듭 탈바꿈을 할 궁리를 했다. 스물다섯 살 무렵 월급을 받기 시작해서 35년 동안 경제활동을 해왔다. 부자가 되지는 못했지만 딸 아들 다 가르치고 여섯 살 손녀까지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다. 그만하면 기본적인 의무는 한 것 같다. 이제 백수라고 비난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주변 친구들도 백수가 대부분이니까.
 
뒷골목의 작은 법률사무소를 하면서 혼자서는 문서공방의 장인이라고 생각하고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글을 써 주었다. 내용증명, 고소장, 준비서면, 진술서 같은 제품들이 나를 먹여 살려 주었다. 겸업도 했다. 수필도 쓰고 칼럼도 쓰고 소설도 제작하면서 살아왔다. 시간의 입자들이 모래시계를 흘러내리듯 어느새 세월이 훌쩍 가고 종착역에 거의 도착한 듯한 느낌이다.
 
돌이켜 보니 세상적인 출세나 명예도 나하곤 별로 인연이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별로 아쉬움은 없다. 나이를 먹어보니까 장차관을 하던 친구도 대법관을 하던 동기생도 모두 평범이라는 한 바다로 다시 모이는 것 같다. 미남도 늙으니까 평등해지고 돈이 더 있다고 해도 부럽지 않다.
 
신문들을 보면 수명은 길어졌는데 죽음을 맞이해서 비참한 가난을 맞이할 우려가 있다고 호들갑이다. 형이하학적 돈의 문제만 거론하지 의미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이 없는 것 같다. 소노아야코 여사가 쓴 ‘계로록’이라는 책을 읽었다. 나중을 생각해서 돈을 웅켜쥐고 걱정하지 말라는 것이다. 늙어서 정말 돈이 다 떨어지면 그때 죽으라고 했다. 늙으면 죽기도 간단하다고 했다. 체력이 약하기 때문에 마음 단단히 먹고 길을 정해 강가나 산길을 끝없이 걸어가면 된다고 했다. 비라도 맞으면 약한 몸에 바로 죽을 수 있다고 했다.
 
그걸 실천하려고 했던 분이 다석 유영모 선생인 것 같다. 몇 년 전 노란 꽃 한송이가 심겨있는 화분을 들고 다석 류영모 선생이 묻혀 있는 풍산공원을 찾아갔었다. 나는 다석 류영모 선생의 ‘다석일지’를 읽고 감명을 받았다. 그는 인생 말년 북한산 계곡에 집을 짓고 경을 읽으면서 지냈다.
 
그는 매일 묵상을 일기로 썼다. 그게 그의 기도라고 했다. 그는 마지막에 혼자 걷다가 산 구석 바위틈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아마 혼자 걸어가다가 조용히 죽음을 맞이하려고 했던 걸로 짐작했다. 인생의 말년을 의미있게 사는 방법을 내게 몸으로 알려준 사람들이 있다.
 
강태기 시인은 자동차 수리공을 하던 소년시절 여러 신문사의 신춘문예에 당선된 천재였다. 달동네 임대아파트의 컴컴한 방에서 폐암으로 시인의 삶이 몇 달 남았을 때 그를 찾아가 만났었다. 그는 내게 의미 있는 삶을 알려주려고 애썼다. 그는 내게 평생 독서를 했는데 죽기 전까지 옆에 놓고 친구가 될 책은 ‘성경과 논어’ 두 권이더라고 얘기해 주었다. 귀한 선물이었다.
 
어느 눈 내리던 밤 죽음을 며칠 앞둔 그의 병상으로 다시 찾아갔었다. 그는 연필로 시를 쓰고 있었다. 그는 세상이 아름답다고 했다. 병실 창에 박힌 눈 녹은 물방울에 저녁 불빛들이 알알이 박혀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는 내게 글을 쓰고 싶으면 절대 미루지 말라고 당부했다. 자신이 젊어서는 인도나 티벳을 순례하면서 내공을 쌓고 육십부터 글을 쓰려고 계획 했더니 환갑이 되자 저승사자가 불러 가게 됐다고 아쉬워했다.
 
시인은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나 그 다음을 얘기하자고 약속했다. 시인은 지금 양평 두물 머리 쪽 강이 내려다보이는 나무 아래 잠들어 있다.
 
원로 소설가 정을병 씨도 내겐 귀중한 삶과 문학의 스승이었다. 그 역시 암에 걸려 죽음이 멀지 않을 때 나와 자주 만났다. 한 달에 한 번씩 광화문 뒷골목의 연포탕 집에서 점심을 먹고 오래된 다방 ‘가을’에서 차를 나누며 인생과 문학을 얘기했었다. 대화라기보다는 그가 전하고 싶었던 자신의 삶과 문학을 내게 알려주는 자리였다.
 
젊은 날 신학교에 다니던 그는 문학에의 순교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일찍부터 가난을 친구삼았다. 밥과 김치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그것도 하루에 한 끼만 먹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는 손가락이 기형이 되도록 글만 쓰고 살았다. 시인과 소설가는 가난해도 행복했다.
 
광화문지하도 노점상에게서 싸구려 영화 시디를 여러개 사다보며 즐겼다. 한번은 ‘킹돔오브헤븐’이라는 시디를 선물로 주면서 그 영화의 구조 속에 소설플롯의 모든 게 있다고 알려주기도 했다. 내게 프레드릭 포 사이트를 알려주고 버지니아 울프를 얘기해 주었다. 죽기 전 날 전화를 했더니 “나 좀 아파요”라고 기운 없는 소리로 말하고는 바로 저세상으로 떠났다. 돈이 없어도 시인과 소설가는 풍요한 삶을 살다가 갔다.
 
인생 후반부에 의미를 찾는 건 돈과는 또 다른 별개의 문제다. 의미도 심각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사는 게 별게 아닌 바에야 내 영혼이 이 지구에 있는 동안 우선 하루하루 즐겁고 재미있게 사는게 의미 아닐까. 너무 심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죽고 나서 영정 저편에서 이 세상을 보면서 인생을 쓸데없이 너무 심각하게 살았다고 후회하지 말아야 하겠다.
 
인생은 바닷가에 모래성을 쌓은 아이들처럼 한바탕의 놀이일지도 모른다. 시인은 시를 쓰고 놀고 소설가는 얘기를 지어내면서 논다. 장군은 병정놀이를 하는 건 아닐까. 어떻게 재미있게 살까 궁리하다가 ‘바둑과 시’를 배워보기로 했다. 이웃 노인들과 바둑을 둘 수 있다면 이제 나는 신선이 될 것 같다.
 
시를 쓰면 나는 시인이 되는 것이다. 바닷가 아이들이 모래성 쌓기 놀이처럼 완성하지 못해도 또 쌓았다가 무너져도 과정의 기쁨만 있으면 충분하다. 나이든 몸을 가지고 안 해 보던 봉사에 참여해 보니까 재미가 별로 없다. 교회식당에서 설거지를 해 봤더니 무거운 국솥 들다가 허리만 아팠다.
 
평생 익혀 오던 일인 내용증명이나 탄원서를 필요한 사람에게 값없이 써 주는 쪽도 봉사가 아닐까. 워즈워드는 의용병으로 전쟁에 안 나가고 방안에서 시를 썼어도 세상을 위한 봉사는 충분히 했으니까. 재미를 느끼지 못하는 봉사는 남보라고 하는 위선일 수 있다. 이제부터는 게으름을 피면서 바둑을 두고 시를 지어야겠다.〠

엄상익|변호사, 크리스찬리뷰 한국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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