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에 떨어진 사람들

엄상익/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2/02/28 [11:54]


나는 중학교 입시에서 떨어졌었다. 교복에 달린 뱃지를 보고 인간을 상등품과 하등품으로 감별하던 시대였다. 이 차 시험에서도 떨어졌던 나는 불량품으로 전락했었다. 그 상처가 지금까지도 영혼에 깊이 새겨져 있다.

 

대학도 내가 원하던 곳에 가지 못했다. 고시도 떨어지고 또 떨어졌었다. 힘들기는 요즈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중학교에 들어간 손녀의 얼굴을 보기가 힘들다. 내신 일등급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커도 고생은 마찬가지였다. 먼 친척 아이는 몇 년간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는데 계속 떨어졌다. 경쟁 또 경쟁의 사회 속에서 시험에서 낙방한 것을 인생의 실패로 생각하는 것 같다.

 

나도 그랬었다. 그러나 긴 삶을 살아 보니까 그건 짧은 생각이었다. 성공했다는 사람들도 결국 어떤 틀 속에서 생각 없는 고등 노예이거나 톱니바퀴 같은 부품노릇을 하다가 인생을 마치는 것 같았다.

 

몇 년 전 남미여행을 하다가 인식의 틀을 넓힌 적이 있다. 그곳에서 성공한 한 교포는 젊은이들이 시선을 외국으로만 돌리면 얼마든지 기회가 있는데 왜 국내에서 그렇게 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배낭여행을 왔다가 아르헨티나에서 성공한 한 젊은이의 얘기를 전해 주었다.

 

중국에서 악세사리와 옷을 떼다가 아르헨티나에 팔아 부자가 됐다는 것이다. 배낭여행을 한 그 젊은이는 새로운 세계에 눈이 열렸던 것 같다. 또 다른 사람을 본 적이 있다.

 

시드니에서 한의원을 하는 교포였다. 육십 대인 그는 비행기를 타고 진맥을 보러 갈 정도로 이름이 났다. 그는 시드니 국영방송에 출연해 한의학을 백인들에게 소개하고 있었다. 성공비결을 묻는 나에게 그는 이런 말을 해주었다.

 

“강릉에서 한의원을 하다가 이민을 왔죠. 처음에 청소로 시작했어요. 화장실 변기에 붙어있는 누런 더께를 닦고 있는 데 뒤에서 누가 ‘최 씨’하고 소리치는 거예요. 나는 무심코 내 일만 했죠.

 

잠시 후 내 뒤에서 작업반장이 부르면 대답을 해야 할 거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이더라구요. 그래도 한의사라 선생님 소리만 듣다가 “최 씨”라고 하니까 내가 아닌 줄 알았죠. 이민 온 나의 위치를 처음 자각하는 순간이었어요. 다음에 용접공을 했는데 불꽃에서 나오는 개스 때문에 매일 코피가 나더라구요. 그래서 접시닦이로 바꿨죠. 그걸 하면서 다시 틈틈이 공부해서 이 나라에서 한의사 자격을 땄어요.”

 

그는 더 바닥으로 내려갔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제가 인생의 어두운 터널을 지나면서 터득한 게 있어요. 이곳에서 영어가 중요한 게 아닌 걸 알았어요. 이곳에서는 겸손이 무기더라구요. 아는 집 교포 아이가 집에서 노는 게 하도 딱해서 제가 학교에 대신 찾아가 준 적이 있어요.

 

그 부모가 영주권이 없으니까 아이가 학교에 못 가는 거였죠. 영어를 못 하기는 그 아이의 부모나 나나 마찬가지였지만 제가 용감하게 가서 교장을 만났어요.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면서 저의 어눌한 영어로 도와달라고 계속 간청을 했죠.

 

내 진정이 통했는지 기다려보라고 하더라구요. 얼마 후 그 아이의 입학이 허가된 거예요. 이곳 외국사람들에게 겸손하게 간청하면 규정에 없어도 얘기가 먹혀 들어가는 경우가 많아요. 영어보다 겸손이 훨씬 통하는 사회예요.”

 

그의 몸으로 삶의 비결을 깨달은 것 같았다. 그가 다닌다는 교회를 따라갔었다. 앞자리 의자 등 받침이 홈에서 빠져 있었다. 그가 그걸 보자 얼른 그 등받침 조각을 의자의 홈에 딱 맞게 끼웠다. 앞자리에 앉았던 사람의 불편을 덜어주기 위한 배려였다. 몸에 밴 남을 위한 행동이었다.

 

겸손과 배려로 무장한 그 같은 사람을 환영하지 않는 나라는 이 세계에 한 곳도 없을 것 같았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그에게 세계는 모두 우리나라였다. 그의 삶을 보면서 자유와 독립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나도 자유롭고 독립된 생활을 하고 싶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길거리에서 성냥팔이를 하더라도 혼자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했다가 혼이 난 적도 있다.

 

시인 워즈 워드는 늪에서 거머리잡이를 하면서 혼자 살아가는 노인의 자유와 독립을 부러워 하면서 글을 쓴 적이 있었다. 국내의 성실한 젊은이들이 믿음을 가지고 세계로 나가면 어떨까.

 

몇 년 전 지구의 최남단 도시 폰타아레나스에서 신라면 가게를 하는 한국인을 만났다. 그 도시에서 유일한 한국인이었다. 그는 혼자 자유로운 성공인이었다. 그와 허그를 하며 헤어졌던 생각이 다시 떠오른다.〠

 

엄상익|변호사, 본지 한국지사장

▲ 엄상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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