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눅 15:1-7)

정지홍/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2/06/27 [14:52]
 ©Felix     


나이가 들어가면서 심해지는 것이 건망증이다. 매일 사용하는 자동차 열쇠에서부터 모발폰, 지갑, 시계, 반지 등 물건을 어디에 두었는지 잊어버리기 일쑤다. 어떤 물건들은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깊은 곳에 잘 두었는데, 너무 잘 두어서 생각이 나지 않고 급하게 필요한 물건일 때는 온 집안을 뒤지며 찾느라 야난법썩이다.

 

이럴 때 빨리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유명한 인터넷 사이트 '위키하우'가 그 방법을 합리적으로 제안해 주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첫째, 마지막으로 물건을 본 게 언제인지 생각해 보기 둘째, 물건이 있을 것 같은 곳 뒤져 보기 셋째, 큰 물건 아래나 작은 공간 살펴보기 넷째, 이전에 물건을 잃어버렸던 장소를 찾아보기 다섯째, 다음부터는 물건 잃어버리지 않기 등 다섯 가지 방법 모두 합리적이다.

 

즉, 잃어버린 물건을 찾기 위해서는 합리적으로 생각하고 합리적인 방법을 택해야 쉽게 찾을 수 있다.

 

합리적이지 않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이 죄인을 찾으실 때는 전혀 합리적이지 않다.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찾으신다. 하나님의 방법은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라 ‘사랑’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목자에게는 1백 마리의 양이 있었다. 들에서 풀을 뜯게 하고 집에 돌아가기 위해 목자가 양떼를 세어보았다. 그런데 아흔아홉 마리 뿐이다. 양 한 마리를 잃어버렸다. 그래서 목자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나선다. 목자가 잃은 양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그 방법이 너무도 이상하다.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그냥 “들”에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우리말 ‘들’로 번역된 헬라어 ‘에레모스’는 ‘황량하고 위험한 들’이다. 사나운 맹수들이 다니는 무서운 들이다. 그 들에 아흔아홉 마리가 덩그러니 남겨져 있다. 목자없이는 보호받을 수 없는 황량하고 위험한 들에 양 아흔아홉 마리가 남아 있다.

 

목자가 없다면 애써 모아놓은 양떼가 이리저리 흩어질 수도 있다. 가축 도둑이 양떼를 노릴 수도 있다. 또다시 길을 잃어버리는 양이 나올 수도 있고, 사나운 맹수들이 양을 물어 뜯기 위해 달려올 수도 있다.

 

간단히 생각해 보아도 한 마리의 양을 찾기 위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남겨둔 목자의 행동이 너무나 무책임하지 않나? 잃어버린 양이 금테를 두른 것도 아닐 텐데, 그 한 마리를 찾겠다고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방치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합리적이지 않다.

 

한 마리 양을 살리기 위해

 

물론 양 한 마리도 소중하고 귀하다. 한 마리라도 잃어버렸다면 찾아야 한다. 그렇다고 아흔아홉 마리를 몽땅 위험에 빠뜨릴 수는 없다. 문제는 이 위험한 상황이 언제 끝날지 모른다는 것이다.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목자가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아흔아홉 마리는 들에 있어야 한다. 들에서 밤을 꼬박 지새워야 하고, 하루가 걸릴지 일주일이 걸릴지 모른다.

 

이같은 목자의 선택은 누가 보아도 이해할 수 없는 전혀 비합리적인 선택이다. 아흔아홉 마리를 한 마리와 바꾼 것이다. 99대 1, 도무지 계산이 안된다. 왜 그랬을까?

잃은 양이 죽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목자가 양을 찾지 못하면 그 양은 죽는다. 양은 다리가 짧고 눈이 어두워서 웅덩이에도 잘 빠지고,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지기도 하고, 깊은 골짜기에 갇힐 수도 있다. 목자가 찾지 않으면 양은 죽고 말 것이다.

 

그래서 목자는 양을 살리기 위해 온 들과 골짜기를 샅샅이 뒤진다. 산에 오르기도 하고 절벽 아래를 내려간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헤집고 다닌다. 언제까지?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목자는 양을 포기하지 않는다.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닌다. 끝까지 찾아다닌다. 잃은 양을 찾아내어 살릴 때까지 찾아다닌다.

 

우리가 받은 구원이 이렇게 귀하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찾으셨기 때문이다. 나를 찾으실 때까지 찾으셨기 때문이다. 죄 짓고 있는 그곳에서, 실패의 수렁에서, 외로운 광야에서, 사망이 꽉 막힌 담벼락 아래에서 절망하고 두려움에 떨고 있던 우리를 하나님이 찾아오셨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가 어디에 있든 포기하지 않고 우리를 찾아오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포기하지 않는 사랑, 찾을 때까지 찾으시는 사랑, 어떻게든 우리를 살리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목자의 기쁨

 

목자는 잃은 양을 찾아 즐거워하며 어깨에 메고 집에 돌아온다. 양을 찾았으니까 즐거워할 수는 있다. 그런데 목자는 큰 비용을 들여 친구와 이웃까지 불러서 잔치를 열었다. 양 한 마리 값보다 더한 비용을 들였다.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느라 얼마나 수고가 많았겠는가? 어디로 도망갔는지 모르는 양을 찾으려고 목자가 얼마나 헤매고 다녔겠나? 또 그 사이에 들에 두고온 양들을 누가 훔쳐가지나 않을까? 늑대에게 잡혀 먹히지는 않을까? 걱정도 많이 했다.

 

정말 힘들고 불안하지 않겠나? 그래서 찾았으면 얼른 집에 들어가 쉬거나, 들에 두고온 양을 살펴야하지 않을까? 그런데 목자는 잃은 양을 찾았다고 다짜고짜 잔치부터 열었다. 그것도 친구와 이웃까지 초청해서 성대한 잔치를 열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 입장에서는 목자를 다시 만난 것만해도 정말 큰 은혜다. 양이 혼자 길을 잃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갇혔다. 하루 종일 물 한 모금을 마시지 못하고 힘도 다 빠졌는데, 사방은 캄캄해지고 무서운 들짐승 소리가 들려온다.

 

그렇게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는데 어디에서 자기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아주 익숙한 목소리다. 그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찾았다’ 그러면서 크고 강한 팔로 자기를 들어올려 안는 것이다. 눈을 떠서 보니 목자였다. 언제나 자기 이름을 불러주고, 사나운 맹수들로부터 지켜주고, 날마다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해주던 자기의 목자였다. 그때 양이 얼마나 기뻤겠는가!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날 지경이다.

 

그런데 목자의 기쁨이 양보다 더 컸다. 잃은 양이 목자를 만난 기쁨보다 잃은 양을 찾은 목자의 기쁨이 훨씬 더 컸다. 그래서 목자는 그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양 한 마리 값보다 더한 비용을 지불하면서 잔치를 열었던 것이다.

 

아흔아홉 마리는 예수님이시다

 

그러면 들에 남겨진 아흔아홉 마리가 누구일까?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

 

예수님은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보다 더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회개할 것 없는 의인”이 있는가? 이 세상에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인이 있나? 없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회개할 것 없는 의인은 아흔아홉이 아니라 한 사람도 없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이다. 오직 예수님만이 완전한 의인이시다. 그래서 들에 남은 아흔아홉 마리가 누구인가? 예수님이시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에레모스, 그 황량하고 무서운” 십자가에 홀로 남겨 두시고 우리를 찾아나서신 것이다. 예수님이 원수들에게 조롱을 당하시고 못 박히시고 창에 찔리시는 데도, 십자가에서 남겨두신 채 잃어버린 우리를 찾으셨다. 그것도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으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찾을 때까지 찾으신다.

 

하나님은 도중에 그만 두시거나 포기하시지 않는다. 아무리 멀고 험해도 우리를 끝까지 찾으신다.

 

우리가 방황하고 죄 짓고 있을 때에도 찾으시고, 우리가 실패하고 넘어졌을 때에도 찾으시고, 우리가 너무 힘들어 한숨 짓고 가슴을 치며 슬피 울고 병들었을 때에도 하나님은 어김없이 찾으신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 무엇을 하든 하나님은 끝까지 우리를 찾으신다. 왜? 사랑에 눈이 멀어버리신 하나님은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요 13:1)

 

신앙 생활은 이 하나님의 사랑, 우리를 끝까지 찾으시고,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에 눈이 머셨다. 아무리 비합리적이고 누구도 이해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다니신다. 제 멋대로 가다가 긿을 잃고 헤매는 우리를 찾아낼 때까지 찾으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샬롬! 〠

 

정지홍|좋은씨앗교회 담임목사  

 
광고
광고

  • 포토
  • 포토
  • 포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