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4학년 때였다.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뛰어 놀고 있었다. 선생님이 갑자기 나를 부르더니 같은 반 아이를 교무실로 데리고 오라고 했다. 운동장을 돌아다녀 봐도 그 아이를 찾을 수 없었다. 내게 선생님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나는 버스를 타고 그 아이의 집으로 찾아갔다. 어느새 해가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그 아이는 식구들과 막 저녁을 먹으려는 참이었다.
“선생님이 너 오래”
내가 그렇게 말하고 그 아이와 함께 다시 버스를 타고 학교로 갔다. 밤이었다. 불이 꺼진 교무실은 적막감만 감돌고 있었다. 이상했다. 명령을 한 선생님이 자리에 없는 것이다. 나는 모자란다는 소리를 들을 단순하고 고지식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교과서와 선생님의 말씀이 절대 진리였다.
유관순 누나가 독립 만세를 부르다가 일본 경찰에게 고문을 당하고 죽었다는 걸 배웠다. 유관순 누나의 영화를 보고 유관순 누나의 노래를 불렀다.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증오가 생겼다.
어른들은 우리나라가 부패하고 불공정한 건 모두 친일파 때문이라고 했다. 내 머리 속에 깊이 박힌 일본에 대한 증오는 성인이 되어서도 그대로였다.
대학 시절 술집에서 일본인들을 만나면 시비를 걸었다. 주먹다짐도 사양할 생각이 없었다. 같이 교육을 받은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을 증오해야 될 것 같은 의무감까지 느꼈다. 그렇지 않으면 친일파가 될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2000년대 초반경 친일반민족행위자를 색출해서 명부에 올리는 위원회가 생겼다. 친일파의 재산을 국가가 강제로 환수하는 법이 제정됐다. 친일파로 지목이 된 사람의 후손이 내게 와서 변호를 부탁했다.
그는 할아버지가 해방 후 그 살벌한 시기에도 친일파로 처벌받지 않았는데 수십 년 후에 친일파가 된 게 억울하다고 했다. 나의 고정관념은 여전했다. 나는 그의 할아버지가 진짜 친일파면 변론을 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그 사건을 맡았다.
나는 그때부터 3년간 매일 국립중앙도서관에 출퇴근하면서 일제 강점기 역사에 대한 방대한 논문들과 자료들을 보았다. 명치유신부터 군국주의 일본까지의 근대사를 공부했다. 그들의 시각과 생각을 알아보고 싶었다. 그 시절의 시사 잡지와 소설들을 상당량 읽었다.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정서와 진실은 문학작품 안에 숨겨져 있기도 했다.
그 후로도 몇 년간 국립도서관을 다니면서 그 시대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내가 가졌던 기존의 의식이 180도 달라졌다. 속아 왔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내 의식 속에 일제 강점기라고 하면 집에 있던 놋쇠로 된 밥그릇까지 빼앗기고 강제로 군대로 끌려가 죽고 밥을 굶은 채 강제 노동을 해야 하는 비참한 시대였다. 그런데 그것은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1941년 이후 4년 사이의 일이었다.
그 이전의 30여 년의 한반도 상황이 아니었다. 일본은 세계에서 두 번째의 경제 대국이었다. 그 경제적 호황을 조선도 함께 누리고 있었다.
파리에서 개봉된 영화가 동경을 거쳐 경성에서 바로 상영이 되고 있었다. 한국인이 경영하는 화신백화점은 일본의 미스코시 백화점과 경쟁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화려한 매장의 지하 식품코너에는 수입 제품들이 쌓여 있었다.
소시지 하나가 몇 전이었다. 모던보이라고 불려지는 남자들이 명동의 다방에서 와글거리고 있었다. 일본의 견직물이 미국 시장을 석권하고 조선인 기업가가 생산한 면직물이 점령지역인 중국을 석권하고 있었다. 만주에 있는 중국 최고의 방적공장은 조선의 민족 기업 경성방직의 소유였다.
그 시절 잡지 신동아에 기고한 한글학자 최현배 선생의 글이 시대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었다. 청소년들이 일본어를 써야 세련된 것같이 생각한다고 한탄하고 있었다. 공무원시험이나 기업의 채용시험에서 일본어 과목 때문에 그런지 아예 한글은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고 걱정하고 있었다.
그 시대 대중들에게 이미 30여 년 전의 조선은 기억에서 사라진 빛바랜 존재 같았다. 1910년 이후 새로 태어난 세대는 친일파가 아니라 일본인 그 자체였다. 대중들은 일등 국가인 일본의 현실에 안주하며 그 덕을 보면서 편하게 세월을 보내고 싶은 존재들 같아 보였다. 당시 사회주의자 인정식의 논문을 보면 전 민족이 친일로 전향했다고 적고 있었다.
그시절의 자료들을 읽으면서 나는 속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가짜 예언자들에게 속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들이 어린 내 머리속에 구겨 넣은 쓰레기 같은 지식들을 버리기로 했다. 그리고 내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 역사와의 관계를 수립하기로 했다. 나를 포함한 우리들은 어린아이와 흡사했던 게 아니었을까. 친일파에 대한 가짜 예언자 무리의 논리를 어겨서는 안 되는 것으로 알아왔다.
그 다음으로는 반공의 명령을 어겨서는 안 되는 것으로 배워왔다. 가짜 예언자들은 자꾸만 율법을 만들고 그걸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몰아간다. 그분은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지니”라고 했다. 나는 진짜 진리를 찾고 싶다.〠
엄상익|변호사, 본지 한국지사장 <저작권자 ⓒ christianreview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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