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나의 고향입니다

일신기독병원 설립자 헬렌 맥켄지(매혜란) 선교사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09/10/07 [10:21]
 선교에 대한 소명

그녀는 지난 시절을 돌이켜보며 모두가 하나님의 축복이었다고 고백했다.

어린 시절 한국의 친구들과 함께 지낸 시간들은 다른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들과 함께 식사하고 함께 뛰놀고 바닥에서 잠을 자며 자연스럽게 언어를 익힐 수 있었지요. 지금 생각해봐도 하나님의 큰 축복이었습니다.


▲ 일신기독병원을 세운 헬렌 맥켄지(한국명 매혜란) 선교사. 1913년 10월 6일 부산에서 출생한 그녀는 한호선교 120주년을 앞둔 지난 9월 18일 저녁 96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 크리스찬리뷰

둘째는, 동생 케서린과 함께 학업을 마치기 위해 호주로 돌아왔을 때입니다. 그때 나이 열입곱이고 동생은 열다섯이었습니다. 동생과 나는 우리들의 미래를 결정해야 할 중대한 시기였지요. 그러나 우리는 앞날에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의 마음 속에는 이미 한국으로 돌아가 선교사가 되어야겠다고 작정을 했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멜번대학에 들어가 약학을, 그리고 동생 케서린은 간호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런데 호주 교육 시스템이 한 가지뿐만 아니라 조산학과 유아복지에 대한 자격증도 요구했습니다. 이것이 앞으로 일신에서 폭넓은 일을 할 수 있는 탄탄한 기반이 될 줄은 그때는 몰랐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섭리이자 축복이었지요.

세 번째 하나님의 역사와 축복은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들어갈 시기인데 불행히도 그때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의지와 반대로 한국으로 들어가는 길이 막히게 되었죠. 일본까지 갔지만 다시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때가 바로 저의 믿음의 테스트 시기였습니다. 선교에 대한 소명이 깨지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저의 믿음을 단련시키시고 산부인과 의사로서 폭넓은 경험을 쌓게 하시기 위한 계획이었음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시내에 위치한 알프레드 병원이 아닌 벤디고 지방 병원으로 보내셔서 큰 병원에 있었으면 경험할 수 없는 많은 수술 경험들을 쌓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조산학과 부인과 의학을 더 폭넓게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지요.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 처음에는 불평도 했지만 후에 일신병원에서 일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길을 더 잘 알고 계시다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축복이지요.

21년만에 다시 한국으로

그녀의 고백대로 하나님의 계획과 예비하심으로 준비를 마친 헬렌은 오직 남자 선교사들만 허락된다는 전례를 깨고 여성으로서 처음으로 멕아서 선교 본부에 의해 1952년 2월 12일 부산항에 도착하게 되었다. 1931년 한국을 떠나 21년 만에 다시 한국 땅을 딛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전쟁의 폐허로 인해 한국의 상황은 좋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다리 밑이나 기차역 바닥에서 잠을 잤고 간혹 텐트에서 생활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운이 좋은 측에 속했다.

환자들을 위한 병원이 시급했다. 열악하지만 일신유치원에 모인 사람들은 일신병원을 열기로 했다. 그때가 1952년 9월 17일이었다. 직원이라곤 헬렌과 케서린, 그리고 사무 직원, 언어교사, 빨래와 청소를 맡은 사람 그렇게 다섯이었다. 10월 들어 의사 한 명과 간호사 세 명이 들어오게 되었고 침대 열다섯, 소아용 침대 열 개가 추가돼 본격적으로 환자들을 받게 되었다.

그 후 1956년 미군의 도움으로 3층짜리 콘크리트 건물로 이전하게 되었다. 1976년에 은퇴할 때까지 그녀는 한국의 의사와 간호사들을 양성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산모들과 아기들을 돌보는 일에 매진했다. 당시 심한 노동으로 방광에 문제가 생겨 오줌이 흐르는 여인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녀의 수술로 새로운 삶을 찾게 되었다.


▲ 맥켄지 가족과 선교사. 매혜란 선교사의 아버지 제임스 노벨 맥켄지 목사(왼쪽 세 번째)는 한국 한센병 환자의 아버지로 불리운다.     © 크리스찬리뷰

지금도 잊혀 지지 않는 것은 오줌이 새는 것으로 평상시 냄새가 난다고 남편에게 버림을 받았던 여인이 있었는데 치료 후 낫게 되자 감격에 북받혀 무릎을 꿇고 제 발을 붙잡고 울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어떤 엄마는 남편으로 인해 매독에 걸려 다섯 명의 아기를 잃었는데 치료 후 건강한 아기를 안게 돼 얼마나 기뻐하던지 우리는 그 기쁨을 함께 했지요. 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들을 섬길 수 있는 기회를 우리에게 주신 것은 진정한 하나님의 축복이었답니다.


생명의 존귀함을 몸소 실천한 헬렌

일신병원의 특징은 가난한 사람들이 와도 차별하지 않고 정성껏 치료를 해 준다는 것이었다. 돈이 없다고 해서 그냥 내보내지 않았다. 오히려 끝까지 돌보아 주고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병원 일자리까지 주선해 주었다. 그 은혜의 혜택을 받은 사람 중에 한 사람이 헬렌의 제자 김영옥 씨다.

어느 날 근무하고 있는데 시골집에서 동생에게 급한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자궁에서 출혈이 심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걱정이 앞섰다. 단지 간단한 치료로 끝날 것이 아니라 자궁 적출을 받아야 하는데 수술비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그녀의 월급은 동생 학비로 들어갔고 수중에 남은 돈이 없었다. 어머니의 수술이 끝난 뒤 조심스럽게 말씀을 드렸다.

"휴가를 반납하고 일을 해서 수술비를 갚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헬렌 원장은 괜찮다며 어머니를 퇴원시켜주었다. 지금도 그녀는 스승의 은혜를 잊지 못한다. 하지만 무조건 아무나 무료로 해주지는 않았다. 돈이 있는 사람에게는 엄살이 통하지 않았다. 어느 날, 한 소아과 과장이 아는 환자를 데리고 와 선생님께 부탁을 했다고 한다.

"원장님, 이 분이 가난해서 수술비가 없다는데 어떻게 안 될까요?"

조심스레 말을 꺼낸 후 원장님의 눈치를 슬쩍 보고 있는데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김 선생, 그럼 김 선생은 돈을 얼마나 내겠소?"

속을 다 들켜버린 김 과장은 본인이 결국 그 친분있는 환자의 치료비를 지불했다고 한다.

헬렌이 여자의 몸으로 큰 병원을 잘 운영하실 수 있었던 비결은 이처럼 명석하고 공정한 일 처리 능력뿐만 아니라 항상 환자를 먼저 생각했다는 데 있다. 생명의 존귀함을 몸소 실천하신 분이었다. 환자를 위해서라면 밤낮을 가리지 않았는데 심지어 한 밤 중 잠을 자다가도 응급환자가 오면 잠옷 바람으로 급히 뛰어나가 치료를 해주었다. 병이 너무 깊어 모두가 가능성이 없다고 말 할 때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3-4시간 다 죽어간 환자의 소생을 위해 매달렸다.

그녀는 환자에 대한 사랑의 마음뿐만 아니라 의사로서의 실력도 뛰어났다. 그녀가 수술하면 아무리 큰 수술이라도 피가 조금밖에 나오지 않게 하였고 흉터 자국도 거의 없게 꼼꼼히 마무리를 하였다고 제자들은 말한다.


▲ 매혜영 (Catherine Mackenzie)     © 크리스찬리뷰

가난과 고통있는 곳에 자신의 일생 바쳐

그녀가 얼마나 뛰어난 실력과 재능을 겸비한 사람이었는 지는 그녀의 학창시절부터 소문이 나 있다. 그녀가 다녔던 고등학교 PLC에서는 예술과 스포츠에도 뛰어나 첼로 연주와 테니스에서도 탁월했다고 한다. 공부도 잘해 당시 여자로서 들어가기 힘든 멜본 의대를 들어갔다. 이렇게 똑똑하고 재능이 많은 분이 자신의 부와 명예를 누리면서 살려고 했다면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가장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곳에 자신의 일생을 바쳤다는 것이 진정 위대한 것이리라.

사실 지금의 일신기독병원은 헬렌 맥켄지 원장이 은퇴하고 생긴 이름이다. 그 전에는 일신부인병원으로 불려졌다. 왜 기독병원으로 정하지 않았는지 그 이유에 대해 물으니 매 원장은 담담히 이렇게 말한다.

"내가 진정한 크리스찬으로 살 수 있을 지 자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매혜란 (Helen Mackenzie)     © 크리스찬리뷰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했던 여인

정년퇴직을 하고 호주에 돌아 온 이후에도 그녀는 신문에 한국에 대한 기사만 나와도 깊은 관심을 갖고 읽은 후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한국 음식도 정말 좋아했다. 그리고 한국에서 가지고 온 자개농과 사진, 카드들을 정성스레 보관하고 있는데 지금도 그녀의 표정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을 읽는 때는 한국에서 제자들이 가끔 보내 온 편지와 카드, 그리고 사진들을 볼 때이다.

그녀는 한국에 추억을 담고 사는 분이다. 일신병원 50주년 기념식 때에 참석을 못했는데 사실 건강이 나빠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한국과 일신병원에 대한 추억을 가슴에 담고 여생을 살길 원했던 것이다. 혹시라도 변해버린 한국과 일신의 모습을 보면 어린 시절부터 담아 온 아름다운 추억들을 잃을 것을 염려한 것이었다. 그녀는 겉만 한국과 일신을 위해 일한 것이 아닌 뼈속 보다 더 깊은 마음에 한국과 일신을 담고 사신 분이다.


▲ 일신기독병원은 2002년 9월 개원 50주년을 맞아 맥켄지 역사관을 개관하고 설립자 매혜란 원장과 매혜영 선생의 흉상을 제작했다. 사진 오른쪽은 막내 동생 실라 여사가 매혜란 원장의 흉상을 보며 기뻐하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예전에 장기려 박사는 그녀의 삶에 대해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이 분은 세 사람 몫의 삶을 살아 오셨습니다. 일생동안 결혼도 안 하시고 한국과 일신을 위해 밤낮 쉬지 않고 일해오신 분이십니다."


▲ 한호선교 110주년을 맞아 멜본에서 열린 기념대회에 참석한 선교사들이 담소하고 있다. 왼쪽 두 번째가 매혜란, 세 번째가 매혜영 선교사이다.     © 크리스찬리뷰

올해로 96세를 맞이한 매혜란 원장이 건강을 잃기 전 했던 고백으로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려 한다.

"Yes, life as a missionary has been full of blessings."


▲일신기독병원 설립자 매혜란 원장의 아버지 매견시 목사(1865-1956, Rev. James Nobel Mackenzie)는 1865년 1월 8일 스코틀랜드의 서해안 `유'섬에서 출생, 글라스코우에서 신학공부 ,`뉴헤브라이즈'라고 알려진  바누아트에서 15년간, 한국에서 30년간 호주장로교회의 선교사로 사역한 위대한 선교 개척자였다. 1910년 2월 부산에 파송되어 호주 선교사 메리 켈리 전도사와 결혼, 슬하에 헬렌(매혜란), 캐서린(매혜영), 루시, 실라 등 네 딸을 두었다. 아들 짐은 두 살 때 디프테리아로 한국에서 사망. 

52개 시골 교회를 맡아 사역했으며, 미국인 의사 어빈이 사역하던 한센병환자 사역을 맡았다. 1912년에 54명의 환자를 인계받아 600명을 치료할 수 있는 상애원을 설립, 환자 사망률 25%에서 2%로 감소시켰고,시골에 900여 명의 한센병 환자를 치료하기 위하여 진료소를 설립했다.
매 목사는 의사자격증을 발급받아 사망진단서를 직접 쓸 수 있었고, 지역사회에서 나병수용소가 아닌 병원으로 인식시켰다. 매 목사는 1938년 호주로 귀국, 1940년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 총회장에 당선되였으며, 1956년 7월 2일 92세로 본가에서 운명했다.©크리스찬리뷰
▲ 일신기독병원에서 매혜란 원장과 함께 간호사로 일했던 김영옥 선생(왼쪽). 그녀는 매 주 화요일 정기적으로 양로원을 방문하여 매 원장을 돌보았다.     © 크리스찬리뷰
▲ 일신기독병원 개원 50주년 기념일(9월 17일, 0시 40분)에 태어난 희년둥이(여)에게 장학금과 기념품을 전달했다.     © 크리스찬리뷰
▲ 한호선교 110주년 기념대회(멜본한인교회)에 참석한 매혜란 선교사, 서두화 목사, 원일한 장로, 멜본한인교회 김영섭 장로, 창신대학 강병도 총장.     © 크리스찬리뷰


글/정원준(멜본 우물교회 담임목사)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