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의 씨앗을 심은 호주 선교사들-그레이스 워렌 선교사 (Dr. Grace Warren)
49번째 의사, 그레이스 워렌 선교사
 
김환기 /크리스찬리뷰
▲   그레이스 워렌 선교사는 19 57년 10월부터 1959년 3월까지 18개월 동안 부산 일신부인병원에서 한국의 산모들을 돌보았다.(카슬힐 자택 거실에서)  ⓒ크리스찬리뷰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봄이 오는 9월 5일 저녁이었다. ‘열린문교회’에서 개최된 ‘맥켄지 한센 선교회 제1회 호주 선교대회’에서였다. 조금 일찍 도착하여 먼저 온 사람들끼리 삼삼오오 짝을 지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이때 얼굴에는 잔주름이 많으며 키가 크고, 아름다운 미소와 해맑은 목소리를 가진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그녀의 가슴에 달린 명찰에는 ‘Dr. Grace Warren’이라고 적혀 있었다.

대회 순서에는 없었지만 그레이스 워렌 선교사와 베리 콜빈 선교사에게 인사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그녀는 간단하고 분명하게 18개월 동안 한국의 일신병원에서 했던 일과 맥켄지 가족과의 관계에 대하여 이야기를 했다. 참석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워렌 선교사에 대하여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한ㆍ호 선교 120주년 기념으로 발간한 640페이지나 되는 ‘열매’(크리스찬리뷰 간)라는 책자에도 달랑 이름만 기제되었을 뿐, 사진도 없을 정도로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분이었다. 그녀와의 짧은 만남과 소개를 통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이상의 중요한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세계를 움직인 위대한 인물

9월 11일 화요일 오전에 인터뷰 약속을 위해 전화를 했다. 서로의 바쁜 일정으로 9월 15일 토요일 오전 10시 그녀의 집으로 취재진이 찾아 가기로 했다. 그날 기자는 모든 것이 미스터리인 상태에서 그녀를 찾게 되었다. 그래서 질문하고 싶은 많은 것들을 마음에 가득 담고 갔다.

그녀가 살고 있는 곳은 성공회에서 운영하고 있는 은퇴마을(Retirement Village)이다. 원래 이곳은 농장이었으나 은퇴한 분들을 위하여 용도를 바꾸었다. 여기에는 1천600세대가 살고 있고 웬만한 공공 시설은 그 안에 다 있다.

선교사였던 아버지가 불의의 비행기 사고로 돌아가시자, ‘교회선교회’(Church Mission Society)에서 체스우드(Chatswood)에 있는 선교관을 마련하여 주었다. 그녀는 1935년부터 그곳에서 살다가 4년 전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조금 일찍 도착했는데 그녀는 없었다. 문 앞에는 10시 15분경에 돌아오겠다는 쪽지가 남겨져 있었다.

얼마 후 안에서 문이 열렸다. 우리는 집 앞에서 기다렸는데, 그녀는 뒷문으로 들어왔다.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녀는 아주 밝고 큰 목소리로 우리를 반겼다. 그녀의 거실은 책과 액자, 서류 등으로 엉망이었다. 걸려 있는 다양한 액자들을 통하여 많은 나라에서 선교한 분이라는 것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우리를 위하여 한국과 관련된 사진을 모아둔 사진첩을 준비하여 놓았다.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그녀는 책장에서 칼라 책자 한 권을 꺼냈다. 세계를 움직인 위대한 인물을 소개한 책이다. 그 안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과학자, 사상가, 철학자, 신학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녀는 책을 펼치며 한 사람을 소개하였다.

‘Dr. David Warren’ 세계 최초로 비행기에 창작하는 ‘블랙박스’(BLACK BOX)를 만든 인물이다. ‘블랙박스’란 ‘비행기록장치’, ‘비행영상장치’를 의미한다. 비행의 모든 활동들이 자동적으로 기록되어 사고가 발생할 경우 원인을 규명할 수 있는 장치이다. 그는 워렌 여사의 친 오빠이다. 워렌 여사는 두 명의 오빠와 한 명의 누이가 있었다.  지금은 모두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막내인 워렌 선교사만 남았다. 그녀는 1928년 생이다. 

하나님의 음성 듣고

- 어떻게 한국에 가게 되었는가?

“나는 어릴 때부터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의료 선교회’(Medical Mission Fellowship)를 통하여, 헬렌 맥켄지 선교사를 알게 되었고, 그녀의 초청으로 한국에 가게 되었다.”

그녀의 한국 선교 동기는 1885년 4월 5일 한국에 온 언더우드(Underwood) 선교사와 유사한 점이 있었다. 언더우드는 원래 한국이 아닌 인도로 선교를 가려고 했다. 그러던 그가 1882년 뉴브룬스취크 신학교에서 한국 선교의 필요성에 대한 보고를 듣게 된다. 인도뿐 아니라 한국에 선교가 필요한 것을 공감하고, 한국을 위하여 기도하고 백방으로 보낼 사람을 찾았다. 그러던 중 그는 성령의 음성을 듣는다.

“왜 너는 가지 않으려느냐” 질문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나는 인도로 갈 사람이니까’라고 생각했었다. 인도로 가려던 마지막 순간에 다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방향을 선회하여 한국으로 오게 된 것이다.

  워렌 여사도 비슷하였다. 그녀는 소속되어 있는 ‘기독교의료친교회’(The Christian Medical Fellowship)를 통하여 인도네시아의 ‘의료 교환 프로그램’(Exchange Medical Program)에 지원했으나 회답을 받지 못했다. 하나님은 그녀를 위한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녀를 전혀 예상하지 않은 곳으로 인도했다.

1957년 7월 어느 날, “멜버른 퀸 빅토리아 병원(Queen Victoria Hospital)에서 근무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물어 보았다. 그녀는 할 수 있다고 했다. 지금 하는 일이 산부인과 일이 아니냐며, 조금 더 구체적으로는 “조산(Premature Babies)에 관한 일도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대화를 끝마칠 무렵에 “혹시 한국에 있는 산부인과 여성 병원에 가서 봉사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는 것이었다.

당시 부산에 있는 일신부인병원(현 일신기독병원)은 한국 유일의 산부인과 여성병원으로, ‘한국 나환자들의 친구’ (Friend of Korean Lepers)라고 불리는 제임스 노블 맥켄지(James Novel Mackenzie, 한국명 매견시) 선교사의 두 딸인 헬렌(Helen Mackenzie) 과 케시(Cathy Mackenzie)에 의하여 건립된 병원이다.
 
부산 일신부인병원으로

일신병원에서는 헬렌 선교사가 안식년으로 비어 있는 동안 기본적 수술과 출산을 도와 줄 의사가 급하게 필요했던 것이다. 그녀는 제안을 기꺼이 수락했다. 그녀가 제출한 서류는 ‘호주장로교선교부’(Australian Presbyterian Mission)의 승인을 받은 후에, 그녀는 헬렌 선교사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한국으로 출국하게 된다.

1957년 10월 14일 시드니 공항에서 헬렌 선교사의 동생인 케시를 만나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당시 시드니에서 한국으로 가는 직항 비행기는 없었다. 다윈을 거쳐 마닐라에서 내려 미국 비행기로 갈아타고, 오키나와를 거쳐 도쿄에서 내려 일박을 한 후, 다음 날 비행기를 타고 서울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미국장로교 선교사들을 만났고, 그들이 그녀를 국내선을 탈 수 있는 곳으로 안내하여 주었다. 국내선 비행기를 타고 부산을 향하여 출발을 하려고 할 때, 갑자기 태풍 때문에 비행할 수 없다는 기내 방송이 흘러 나왔다. 비행은 취소되었다.

다행히도 미국친구들이 가지 않고 그곳에 있었다. 기차역으로 안내를 받아 부산행 야간열차 침대칸에 탈 수 있었다. 키가 174m인 그녀에게는 침대는 무척 좁았다. 드디어 그녀가 부산진역에 도착했을 때 많은 사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후 18개월 동안 그녀는 일신부인병원에서 근무하였다. 
 
▲ 일신조산원 18기 졸업식에서(오른쪽 2번째가 그레이스 워렌)    ©크리스찬리뷰
▲  첫돌 잔치에 초대받은 그레이스 워렌(가운데)   ©크리스찬리뷰

 나환자 사역
 
- 나병과 관련된 사역은 어떻게 시작했는가?
“부산에서 나는 많은 선교사들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 중 한 분이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대구에 있는 나환자 촌에서 사역을 하고 있었다. 가끔 나는 그곳을 방문하여 나환자들을 도와 주었다. 이것이 나환자 사역과 관련된 나의 첫 번째 경험이다.

한국에서의 사역을 마칠 무렵에 ‘국제나병선교회’(The Leprosy Mission International)의 초청을 받아, 1959년 5월 4일에 홍콩에 있는 나환자 병원으로 사역지를 옮겼다. 그곳에서 나는 본격적으로 나환자 치료를 시작하였다. 그때 비로서 이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맡긴 사역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책을 보며 나병에 대한 연구를 했다. 나는 수술뿐 아니라 나병에 대한 전문적인 교육을 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26개국을 순회하면서 수술도 하고 교육도 했다.”

그녀는 세계 지도를 펼쳐서 자신이 사역했던 곳을 설명해 주었다. 아프리카는 물론이고 일본, 이스라엘에 가서도 나병 수술과 교육을 했다. 1966년에는 일본을 거쳐 한국에 가서 나환자 치료를 하기도 하였다.”

- 홍콩의 나환자 병원은 왜 문을 닫았는가?
“1959년부터 1975년까지 나는 홍콩의 나환자 병원에서 근무를 했다. 하지만 더 이상 양성 나병이 발생되지 않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치료를 받아 사회로 환원되었다. 그러다 보니 병원이 존속할 이유가 없었다. 결국 정부는 1975년 문을 닫고 나환자 병원을 개조하여 알코올 재활센터로 사용하였다.”

- 그 후 무엇을 하였는가?
“나는 10개국을 순회하며 나환자 조사, 수술 그리고 교육을 했다. 먼저 현장을 방문하여 조사하고, 다시 돌아와 수술을 하고 교육을 하였던 것이다. 내가 떠나면 누군가 그 일을 계속해야 하기에 현지인을 교육시키는 것이 정말 중요했다. 나는 한 곳에 3주 이상을 머물지 않았다. 제3세계의 시설은 선진국에 비하여 아주 열악하다. 그래서 각 지역의 상황에 맞는 치료법을 개발해야만 했다.

사실 나의 독창적인 치료법은 아버지에게서 물려 받았다. 아버지는 아주 창조적인 사람이었다. 한번은 다윈에서 자동차 바퀴가 부서졌는데 그는 근처의 나무를 꺾어서 바퀴를 만들어 집에까지 왔다. 대부분의 의사들은 의료에 관련된 일 외에는 다른 것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어릴 때 대공항을 겪었다.

당시에는 장난감 하나 쓸만한 게 없었다. 그래서 주변의 물건들을 장난감으로 쓰고, 필요한 물건은 직접 만들었다. 이런 어릴 때의 경험이 제3세계에서 선교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People who changed the world’ 책자에 실린 세계 최초로 비행기에 장착하는 블랙 박스를 만든 데이비드 워렌 관련 기사. 그는 그레이스 선교사의 친오빠이다. ⓒ크리스찬리뷰

 지도를 펴들고 자신이 사역했던 국가들에 대해 김환기 사관(본지 영문편집위원)에게 설명하는 그레이스 워렌 선교사 ⓒ크리스찬리뷰

 1957년 10월 한국 김포공항에 도착한 그레이스 워렌(가운데)과 케시 맥켄지(오른쪽) ⓒGrace Warren

▲  그레이스 워렌을 마중나온 미국 선교사들 ⓒGrace Warren
▲   그레이스 워렌 선교사로부터 치료받은 나환자들 ⓒGrace Warren

TLM사역

- 독자적으로 사역을 하였는가?
“아니다. 1959년부터 1989년까지 ‘국제나병선교회’(Lechery Mission International)의 일원이었다. 1975년 홍콩의 사역이 끝난 후에도 1989년 ‘국제나병선교회’에서 은퇴하기 전까지 선교단체의 지원을 받았다. 많은 돈은 아니었지만 선교에 큰 도움이 되었다. 지금은 은퇴하고 선교회의 부회장으로 봉사하고 있다.”

- TLM(The Leprosy Mission International)은 어떤 단체인가?
“TLM은 비영리 단체로서 1874년에 창립되었고, 전세계의 나병환자들을 돌보고 있는 단체이다. TLM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나병선교 단체이다. TLM의 비전은 ‘나병 없는 세계’(a World without Leprosy)이다. 현재 50여 개국에 지부가 있고, 26개 지역에서 사역을 하고 있다.” 

그녀는 벽에 걸려 있는 명찰을 보여 주었다. ‘Vice President Australia’ 라고 써 있었다. 호주 출신의 국제나병선교회 부회장이란 의미인데, 잘못 해석하면 ‘호주 부통령’으로 오해할 것 같다며 큰소리로 웃는다.
 
- 세계보건기구(WHO)와 어떤 관계인가?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나환자 단체를 재정적으로 도와 주고 있다. WHO 기준에 의하면 나병은 특별한 증상이 있어야 하고, 감각이 없어야 하며, 치료가 되면 더 이상 나병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하지만 WHO의 기준보다 나병은 더 오랜 기간 치료를 해야 하며, 후속 조치가 반드시 필요하다. WHO에서 인도는 더 이상 나병 위험지역이 아니라고 하는데, 실질적으로 그곳에는 신고하지 않은 많은 나환자들이 있다.”

- 세계에 얼마나 많은 나환자가 있는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WHO는 나병은 더 이상 문제되는 병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컴퓨터에서 WHO가 발표한 통계를 보여 주었다. 그녀가 보여주는 통계를 보면 2003년 514,718명 이었고, 2009년에는 244,796명 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나환자는 아주 적었다. 그녀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이것은 WHO의 주장이다. 실질적으로는 전 세계에 얼마나 많은 나환자가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 왜 결혼을 하지 않았나요?
“하하하, 하나님은 유머가 많으신 분이다. 한 곳에 3주 이상을 머물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결혼할 수 있겠는가?”

내가 그녀에게 던진 질문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했을 것이다. 그녀는 자서전에서 명백하게 이유를 밝히고 있다.

“우리는 오늘을 살면서, 내일을 꿈꾸지만, 오직 과거만 이해할 뿐이다. 만약 남편이나 자식이 있었다면 하나님이 나에게 맡긴 사역을 결코 수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대신 하나님은 나에게 인종과 나라를 초월한 전세계 가족을 허락하여 주셨다. 그리고 나에게 그들의 삶의 질을 높이라고 하셨다. 그들 또한 나의 삶을 풍요롭게 했다. 호주에서도 내가 어디를 가든지 나를 가족으로 환영하여 주고 있다. 이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 아프리카 나이제리아  어린이를  검진하는 그레이스 워렌 선교사 ⓒGrace Warren
 
▲  발 수술받은 네팔 어린이의 상태를 살피는 그레이스 워렌   ©크리스찬리뷰

49번째 의사 (Doctor No 49)
 
▲  그레이스 워렌 선교사 자서전 표지   ©크리스찬리뷰
- 왜 자서전 제목이 ‘Doctor No 49’인가?
큰 웃음과 함께 그녀는 책의 맨 뒤 페이지를 펼치며 설명해 주었다. “2000년 1월 어느 날 아침 몇몇의 당뇨 환자를 진료하고 난 후였다. 30대 초반의 젊은 청년(Darren)이 나에게로 왔다. 그는 당뇨 환자가 아니고, 마치 술 취한 선원 같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바퀴가 달린 보조기구를 의지하여 나에게 왔다. 그는 피식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내가 만난 49번째 의사입니다. 제 다리를 고쳐 주실 수 있겠습니까?’ 
나는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전문 소방 요원이었다. 소방훈련 중에 많은 사람들이 할 수 없는 고난도의 훈련을 통과했다. 특별히 공중착지훈련을 통과한 소수의 사람 중의 하나였다. 
 
1994년 그에게 재난이 덮쳤다. 훈련 도중 낙하산이 엉기면서 그는 그대로 땅에 곤두박질쳐졌다. 그는 오른쪽 다리가 부러졌고, 중추신경이 마비되어 통증을 느끼지 못하였다. 여러 번의 수술 끝에 부러진 오른쪽 다리는 고쳤지만, 다치지 않은 왼쪽 다리의 근육은 움직이지를 않았다. 그는 5년 동안 여러 번에 걸쳐 뼈와 피부 수술을 하였다. 하지만 왼쪽 다리는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 나에게 오기 바로 직전인 48번째 ‘혈관 전문의’(Vascular surgeon)의 최종 의견은 다리를 절단(Amputation)하는 것이었다. 
 
‘정말 다른 방법이 없는 것인가’ 흐느끼는 그에게 ‘발전문의’(Podiatrist)가 워렌 의사를 찾아 가보라고 권고한 것이다. X-ray 검사 후 나는 고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내가 당신을 도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걸릴 것입니다.’ 
이 말은 그에게 희망이었다. 그는 즉각적으로 시작하자고 했다.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절단된 다리로 사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결국 나는 그와 한 약속을 지켰다.” 

  큰 상자 안에 가득한 훈장과 상패들

- 받은 상 중 어떤 것이 가장 의미 있는가?
받은 상에 대하여 묻자, 그녀는 한쪽 구석으로 나를 인도했다. 그곳에 있는 큰 상자를 열자, 안에는 여러 나라에서 받은 훈장과 상패들이 가득하였다. 그녀는 다양한 상을 받았다. 
 
▲  파키스탄에서 받은 민간인 최고 훈장인 'The Star of Pakistan'   ©크리스찬리뷰
 
▲ 맥켄지 한센선교회 1회 선교대회에 참석하여 인사하는 그레이스 워렌(오른쪽부터 장경순 목사, 그레이스 워렌 선교사, 베리 콜빈 선교사, 박웅걸 목사)    ©크리스찬리뷰
▲ 그레이스 워렌 선교사    © 크리스찬리뷰

“아마 파키스탄에서 받은 상이 가장 의미있는 상이 아닐까! 모슬렘 국가인 파키스탄에서 민간인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상이다. 그런 상을 기독교 독신 여선교사인 나에게 주었다는 것은 아주 의미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 인생의 하이라이트는 무엇인가?
“하하하,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이라이트라고는 말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모슬렘 국가인 방글라데시에서 의료진에게 강의할 때다. 그곳 매니저가 나를 이렇게 소개했다. 
 
‘미스 워렌 의사는 독신으로, 스승인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나병 환자들을 돌보고 있는 분입니다.’
 
정말 의미 있는 소개였다. 모슬렘 국가에서 예수가 증거되는 순간이었다.” 
 
헤어지기 전 우리는 그녀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그녀는 간절한 마음으로 이렇게 기도했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오늘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이들을 축복하여 주시옵고, 특별히 중국에서 나환자를 위하여 수고하는 분들을 축복하여 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헤어져야 할 시간이 되었다.
최소한 나병과 관련하여 그녀는 ‘걸어 다니는 역사’요, 그녀의 집은 ‘박물관’이었다.
 
우리는 ‘역사와 박물관’을 뒤로하고 작별 인사를 했다. 잡지가 나오면 다시 찾아 뵙고 식사를 하자고 했다. 그녀는 특유의 큰 웃음으로 고맙다고 화답하며, ‘불고기’를 먹자고 말했다.〠 
 
▲ 1959년 3월 일신병원을 떠나며 직원들로부터 선물을 받은 한복을 입고 있는 그레이스 워렌 선교사  ©크리스찬리뷰
글/김환기|크리스찬리뷰 영문편집위원, 호주구세군 한인사역 및 수용소담당관
사진/권순형|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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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2/09/25 [10:51]  최종편집: ⓒ christian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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