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정지홍/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3/03/25 [16:48]

사람의 겉모습이 그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속에서 곧 그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들, 음탕과 질투와 교만함 등과 같은 악한 마음이 그 사람의 존재를 더럽게 하는 것이다. 

 겉모습을 아무리 번듯하게 치장하고 깨끗하게 해도 마음이 더럽다면, 결코 그 사람을 깨끗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마 5:8)이라고 하신다. 
 

마음이 본질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겉사람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속 사람에 관심이 계신다. 우리의 옷차림에 눈길을 두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속 마음을 꿰뚫어보신다. 우리의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중히 여기신다.

왜냐하면 마음이 우리의 본질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에도 없는 외식, 그저 겉모양만 깨끗하고 마음은 더러웠던 바리새인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마 23:27-28)라고 질타하셨다.

하얗게 회칠한 무덤은 겉에서 보기에는 깨끗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그러나 무덤이 무엇인가? 아무리 밖을 깨끗하게 칠하고 단장해도 무덤 속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하다.

바리새인들이 그랬다.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는 것 같았지만, 그 마음에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음이 더러웠던 바리새인들에게 눈이 멀었다고 하셨다(마 23:26). 마음이 더러워서는 제대로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마음이 먼저다. 목숨보다도 마음이 먼저다. 우리의 마음을 다해서 사랑해야 우리의 목숨도 다하고 우리의 뜻도 다해 사랑할 수 있다. 그래서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 더욱 우리의 마음을 지켜야 한다. 생명의 근원이 마음이기 때문이다. 
 

청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본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곧잘 이런 말을 한다. ‘하나님을 보면 믿겠다, 하나님을 보여주면 믿겠다.’고 나도 정말 하나님을 보고 싶다. 신앙의 궁극은 신앙의 대상을 보는 것이다. 신앙의 대상을 만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앙하고 하나님을 믿는 가장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앙은 하나님을 보기 위한 순례의 여정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본다고 하신다. 마음이 청결한 자가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 청결한 자가 정말 복 있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청결한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우리말 “청결한’으로 번역된 헬라어가 ‘카타로스’인데, 티없이 맑고 순결한 상태를 나타내는 단어다. 한 점의 흠도 없이 완전무결하게 깨끗한 상태가 카타로스, 청결이다. 그런데 우리 마음을 우리 스스로가 완전무결하게 티없이 맑고 순결하게 할 수 있을까?

첩첩산중에 들어가 아무리 도를 닦고 참선을 쌓아도 과연 우리 마음을 카타로스, 청결하게 할 수 있을까?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사도행전 9장에는 바울이 사울이었을 때, 다메섹으로 가던 중 빛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 강렬한 빛 가운데서 주님을 만난 사울은, 눈을 떴으나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리고 3일 동안, 사울은 눈뜬 장님이 되었다. 그런 사울에게 주님은 아나니아를 보내어 사울을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다. 아나니아의 기도가 끝나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 지라”(행 9:18)

사흘 동안 굳게 닫혀있던 사울의 눈이 열렸다. 세상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냥 보게된 것이 아니라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지고 나서야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사울의 눈에는 비늘 같은 것이 끼어 있었다. 그런 눈을 가지고서 어떻게 하나님을 볼 수가 있을까?

예수님께서 “눈은 마음의 등불”이라고 하셨다. 눈이 곧 마음이다. 사울의 눈에 끼어있던 비늘은 곧 사울의 마음에 끼어 있던 비늘이었다. 더럽고 추한 마음의 비늘이었다. 그 비늘이 벗어질 때, 사울의 마음은 청결해졌다. 우리의 더럽고 추한 마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빛 속에서만 청결해질 수 있다.  
 

예수님의 마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실 때, 우리의 의로움이나 우리의 선행 때문에 사랑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를 사랑하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

우리의 죄악과 허물이 아무리 크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줄어들게 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실패할 때도 좌절할 때도 추하고 더러울 때도 영원히 사랑하신다. 내 모습이 어떠하든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신다. 그런데 있는 모습 그대로 두시지는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이 새로워지기를 원하신다. 더러운 마음 그대로의 우리를 사랑하시지만, 우리의 마음이 청결해지기를 원하신다. 왜냐하면 그때에만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이 무엇으로 새로워질 수 있을까? 예수님의 마음이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품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예수님의 마음이 청결하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이미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사시기 때문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우리가 믿음 안에서 살 때,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다. 예수님이 내 안에 사시는 순간부터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의 마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 2:16에서 이같이 고백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 
 

마음의 등불을 켜라 

그런데 이상하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졌는데도 왜 여전히 청결하지 못한 것일까?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데도 왜 여전히 내가 드러나는 것일까? 마음의 등불을 켜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이미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마음을 주셨는데도, 우리가 마음의 등불을 켜지 못한다면, 아무 것도 볼 수가 없다. 그러나 마음의 등불을 계속해서 켜두면 어떻게 되겠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항상 내 마음을 비추면 어찌 되겠는가? 예수님을 항상 만나고 있다면 어떠할까? 항상 모든 것을 볼 수 있지 않겠는가! 하나님도 볼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날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우리 마음에 날마다 그리스도 빛을 비추어야 한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 비늘이 벗어진 것처럼 날마다 예수님을 만나 우리 마음에 낀 비늘들을 벗어내야 한다.

그렇게 우리 마음의 등불을 켜는 스위치가 말씀과 기도다. 날마다 예수님을 만나는 스위치가 말씀과 기도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 예수님이 우리를 만나 주신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우리의 마음을 비추어주신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 우리의 마음을 청결하게 해주신다. 

오물이 낀 렌즈나 뿌연 안경으로는 사물을 제대로 볼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더러운 마음으로는 영이신 하나님을 볼 수가 없다. 우리의 마음이 청결해야만 하나님을 볼 수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말씀과 기도를 통해 예수님을 만나야 한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 마음의 욕망과 불신과 더러움의 비늘을 벗겨주시고 새롭게 해주실 것이다. 청결하게 해주실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청결해진 마음으로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다.〠

 
정지홍|좋은씨앗교회 담임목사 blog.daum.net/goodseed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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