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살다 죽어야 하나?

김환기/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5/06/29 [10:40]
예수를 믿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사도행전 11:26, 26: 28, 베드로전서 4:16' 세 차례 언급되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예루살렘의 핍박을 피하여 안디옥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안디옥 사람들은 자기들과 말, 문화, 행동, 세계관 등이 다른 이상한 사람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살고 있지만, 이 땅에 속한 사람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늘의 시민권'(빌3:20)을 가지고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사람이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했다는 것은 내가 나의 주인이 아니라 예수가 나의 주인이 되었다는 뜻이다.
 
주인이 바뀐 것이고, 중심이 바뀐 것이고,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고전10:31)고 했다. 
 
사는 것도 주를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은 그리스도인의 전반적인 삶을 지배하는 기본원리이다. 교회에서 하는 일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일상생활은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과 연관되어야 한다. ‘왜 아침에 눈을 뜨는가, 왜 직장에서 일을 하는가, 왜 친구를 만나는가, 왜 공부하는가’ 등의 모든 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사관학생 때 자선냄비 대신 기업모금을 했다. 그때 갈보리 교회 집사였던 유한킴벌리 인력개발 부장을 만났다. 그는 "제 본업은 전도이고 제가 하는 일은 부업입니다"라고 자기소개를 했다. 부업이니까 소홀하게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가 일을 대하는 태도이다.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골3:17) 28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죽는 것도 주를 위하여
 
얼마 전 이슬람권을 선교하는 한 단체의 초청을 받아 설교를 했다. 선교의 사각지대인 이슬람권을 선교하는 것은 순교를 각오하지 않고는 어려운 일이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여기서 증인이란 단어는 '순교자'(μάρτυς)이다. 자기 신앙도 지키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증인이 된다는 것은 순교를 각오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이슬람권의 선교가 그렇다. 어찌 이들이라고 죽음이 두렵지 않겠는가? 하지만 죽음의 두려움보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크기에 떠날 수 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죽음이란 땅을 중심으로 생각하면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하늘을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본향으로 가는 것이다. 죽음은 삶의 끝이 아니라 삶의 완성이다.
  
우리는 살아야 할 이유와 죽어야 할 이유가 동일해야 한다. 만약 이것이 다르면 삶의 끝자락에 섰을 때, 살아왔던 삶에 대하여 후회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자신을 위하여 살 수는 있지만 자신을 위하여 죽을 수는 없지 않은가? 바울은 살아야 할 이유와 죽어야 할 이유가 동일하였기에 죽고 사는 것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김환기 l 크리스찬리뷰 영문편집위원, 호주 구세군 한인사역(Korean Ministry) 및 수용소 담당관(Chaplian, Detention Cent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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