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충우돌의 성지순례(6)

김환기 사관의 성지학술연구

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0/05/31 [11:55]
                                                                                                      글/김환기
 
에베소에서 ‘돌무쉬’(미니버스)로 서머나(이즈밀)까지는 약 60Km 정도로 1시간이 걸린다. 서머나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두움이 대지를 깊이 덮고 있었다.  터미널의 찬란한 불빛을 보고 에베소 같은 작은 도시일 것이라는 막연한 상상이 산산이 부서졌다.

사전 정보 없이 좌충우돌로 부딪치는 여행의 한계를 다시 한 번 뼈저리게 느낀다. 서머나는 터키의 3번째 큰 도시로 인구가 400만 명이나 산다.  버스에서 내려 잘 곳을 찾았으나 호텔뿐이 없었다.  버스를 타고 시내로 갔다. 시내 중심부 쯤 되는 곳에서 내렸다.  항구도시라서 그런지 아프리카, 아랍 등지에서 온 노동자들이 머무는 골목이 있었다.

어스름한 뒷골목으로 들어가니 여인숙이 보인다. 첫째 집에 들어가니 금방이라도 바퀴벌레가 나올 것 같아 옆집 여인숙으로 갔다. 같은 가격이지만 그나마 시설이 첫째 집보다는 조금 괜찮은 것 같았다. 조그만 변기와 함께 샤워할 수 있는 공간도 있었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 때나 있을 법한 ‘수신용 전화기’가 달랑 벽에 붙어 있었다. 잠자는 데는 전혀 문제없을 것 같아 돈을 지불하고 짐을 풀었다.    

 
▲ 고고학 박물관     © 김환기

서머나 (이즈밀)  

‘서머나’(Smyrna)의 현재 이름은 ‘이즈밀’(Izmir)이다. 이즈밀은 수백 년 동안 역동적인 상업 항구도시였으며, 다양한 종료의 농산물로 유명하다. 특히 이 지역은 에게해에서 산재해 있는 많은 다른 역사적인 지역과 연관이 있다. 해변을 끼고 발달된 이즈밀은 아름다웠다.  공업이 발전된 도시는 아니지만, 많은 물품들을 수출하고 있다. 이즈밀을 중심으로 한 ‘에게해’ 지역에서 생산되는 연초와 건포도를 비롯한 농산물, 그리고 세계적으로 명성을 자랑하는 터키 대리석, 양 가죽 등으로 주요 수출 품목이다. 빠른 도시화의 영향으로 고대 건축물들은 대부분이 파손되었다. 역사의 중요성을 뒤늦게 깨달았는지 여러 곳에서 유물 발굴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나는 ‘고고학 박물관’에 들어가서야 이즈밀의 역사를 조금이나마 더듬을 수 있었다.

호머의 고향인 이즈밀에 최초로 정착한 부족은 기원전 3000년 ‘아마존 여인족’이라고 한다. 기원전 2000년 말까지 수백 년 동안 이 지역을 지배했던 ‘히타이트인’들의 통치는 ‘이오니아인’들의 도착과 함께 끝이 난다. 그 후 이즈밀은 수 차례의 자연 재난을 당했다.

  서기 178년 에게해를 휩쓴 대 지진에 의해 폐허가 되었으나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의 명령으로 다시 복구된 바 있다. 또한 1차 세계 대전 후, 1919년의 터키-그리스 간의 전쟁에서 한때는 이 도시는 그리스에 의해 점령당했다가 수복된 바 있었다. 이 치열한 전쟁 중인 1922년에 원인모를 대화재가 발생하여 도시의 대부분이 파괴되기도 했다. 이 화재는 역사상 가장 큰 화재들 중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끔찍한 재난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는 그때마다 빠른 속도로 재건되었다.

▲ 서머나교회     © 김환기

서머나 교회 (폴리갑 기념 교회) 

서머나에는 요한계시록의 일곱교회 중에 하나인 ‘서머나 교회’가 있다.(계 2:8) 천신만고 끝에 찾아 갔으나 교회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벨을 누르니, 누군가 안에서 대답 한다. “이곳은 더 이상 개인에게 공개하지 않습니다.” 하고 문을 열어 주지 않는다. 이슬람 국가이어서 보안상의 문제도 있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 관리하기도 힘이 들었던 것이다. 몇 번이고 사정을 해보았지만, “No English”라며 수화기를 내리는 것이다. 벨을 다시 눌렀다. Korea에서 왔다고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대로 물러서야 하는 것인지 답답하기만 했다. 너무 난감하여 아무런 생각 없이 서머나의 푸른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천사 대신 하얀 ‘대형관광버스’를 보내 주시는 것이 아닌가!  성지순례 온 목회자 일행이‘서머나 교회’를 방문한 것이다. 인솔자가 벨을 누르고 유창한 터키말로 뭐라고 하니, 굳게 닫힌 철문이 열리는 것이다. 바울은 빌립보 감옥에서 기도하고 찬미할 때 옥문이 열렸는데, 나는 하늘을 우러러 보기만 해도 문이 열리니 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 

서머나 교회는 환난을 많이 당한 교회이다.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 이곳에 이주하여 살았던 유대인들에게 훼방과 핍박을 받았다(계 2:9). 주께서는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죽도록 충성하라고 격려했고,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도 했다.(계 2:10-11).  

 이곳은 사도 요한의 제자였으며 서머나 교회의 초대 감독이었던 ‘폴리갑’이 순교한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새롭게 건물을 짓고 교회 정문에 ‘성 폴리갑’(Saint Polycarpe)라는 머릿돌이 새겨져 있다.  

 
▲ 폴리갑은 86세에 순교했다.     © 김환기

폴리갑(Saint Polycarpe) 

폴리갑(A.D. 80-165)은 본래 안디옥 출신이었다. 구전에 의하면, 서머나의 어느 과부가 안디옥에서 폴리갑을 노예로 샀는데, 그가 너무 똑똑해서 그녀가 죽게 될 즈음에 폴리갑을 자유인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폴리갑은 젊었을 때 사도 요한의 가르침을 직접 받았다. 성격은 직설적이고, 정열적이었다.

20대의 청년 나이에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 되었고, 86세 때에(아우텔리우스 황제) 순교했다. 폴리갑은 사도 요한의 가르침을 후대에 가르치고, 가르친 대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죽음의 위협 속에서 폴리갑은     “86년간 나는 그분을 섬겨 왔고, 그분은 나를 한 번도 모른다고 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주님을 모른다고 하란 말인가?”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화형 직전 폴리갑은 마지막 기도를 이렇게 했다.   

“사랑하는 복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당신에 관한 지식을 주신 아버지여! 당신 앞에 살고 있는 모든 천사들과 천군들과 피조물, 그리고 모든 의인들의 하나님이시여! 당신께서 오늘 이 시간 나로 하여금 순교자의 반열, 그리스도의 잔에 참예하게 하시어 내 몸과 영혼이 성령의 썩지 않은 축복 속에서 영생의 부활을 얻기에 합당하게 여겨주심을 감사하나이다.

오늘 나는 신실하고 참되신 하나님이신 당신께서 예배하시고, 계시하시고, 이루신 풍성하고 열납될 만한 제물로 당신 앞에 드려지기를 소원하나이다. 나는 이 모든 일을 인하여 당신의 사랑하는 독생자, 영원한 대제사장을 통해서 당신을 찬양하고, 감사 드리며 영광을 돌리나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이제부터 영원토록 영광이 있을 지어다. 아멘”

내일은 에베소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쿠사다시’(Kusadasi) 항구에서 ‘밧모섬’(Patmos)으로 가는 배를 타야 한다. 비수기라 직접 가는 배가 없어, ‘사모스’(Samos) 섬에서 하룻밤을 자야 한다.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한 ‘밧모섬’에는 어떤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김환기/호주구세군 다문화 및 난민 조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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