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탈에서 얻는 통찰

묵상이 있는 만남

이규현/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0/08/23 [13:59]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고 했다. 새장에 갇힌 새가 볼 수 있는 세상이란 그저 밥그릇에 던져져 있는 모이가 전부일 뿐이다. 우물안의 개구리들은 하늘이 자신들이 살고 있는 우물 이상 크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산다. 어쩌다가 우물 바깥에 나갔던 개구리가 돌아와 들려주는 우물보다 하늘이 크다는 이야기에 분노하며 우물을 우습게 보는 그를 핍박한다. 관광 가이드들은 자기가 알고 가본 곳까지만 사람들을 안내해 준다. 당연히 내가 가보지 않은 곳으로 사람들을 데려다 줄 수는 없다. 

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내 발자국을 찍는 곳이 정해져 있다.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그곳을 벗어나지 못한다. 늘 다니는 골목, 출퇴근하는 노선, 모든 동선이 빤하다. 공간적인 면만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사고의 영역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난다. 다른 쪽은 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소위 한국의 좌파와 우파는 딱할 정도로 심각하게 나뉘어져 있다. 내가 본 세계로부터 벗어나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기가 만든 감옥 안에 자신을 가두고 스스로를 감금한다. 

무엇을 보았는가 하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다. 본 것이 결국 인생을 결정한다. 사업을 잘 하는 사람은 남들보다 조금 더 본 것이 있다. 다른 사람이 본 것을 똑같이 보았다면 돈을 어떻게 벌 수 있겠는가? 얼마나 벌 수 있는가? 분석보다 통찰이 중요하다. 현대인들은 지나칠 정도로 분석을 잘 한다. 하지만 통찰력에 있어서는 심각할 정도로 떨어지는 것이 우리 시대 위기다.  멀리 보는 시각에 트러블이 생긴 것이다.

배를 타고 항해를 할 때 가까이 있는 물결을 보고 있으면 멀미가 난다. 손정의 소프트 뱅크 회장은 “눈앞을 보기 때문에 멀미를 하는 것이다. 몇백 킬로미터 앞을 보라. 그곳은 잔잔한 물결처럼 평온하다고 했다”

삶의 불행한 결정들이 있는 곳에 가보면 거의 틀림없다. 그곳은 근시안적으로 보고, 평가하고, 결정한 결과임을 알 수 있다. 너무 짧게 보면 실수를 할 수 밖에 없다.

바둑에서 훈수를 두는 사람은 한두 급수가 올라간다고 한다. 자신의 문제에서 비껴나 사물을 보면 조금 더 멀리 볼 수 있게 된다. 숲을 보려면 한발 뒤로 물러서야 볼 수 있다. 사업 실패의 요인도 당장의 이익에 너무 집착하여 큰 것을 잃어버리게 되는 데 있다. 

경영학의 대가인 피터 드러커는 10분 후와 10년 후를 동시에 보는 통찰력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계 톱 리더들이 모여 토론 하는 것을 본 누군가가 소감을 말하기를  ‘그들은 20년 후의 일을 마치 오늘 일어난 일처럼 들여다 보고 이야기 하더라’는 것이다. 세상은 멀리 보는 사람이 만들어 간다. 멀리 보는 것이 실력이다. 창의력이란 남들과 다른 것을 보는 눈이다.

가끔 고전을 읽다 보면 대가들의 글에서 마음을 흔들어 놓는 힘을 느끼게 된다. 얄팍한 유행을 거스리고 시대를 초월한 혜안에 놀라게 된다. 그런 책들을 읽다 보면 영혼의 깊숙한 곳이 묵직하게 터치되는 것을 경험한다. 바로 그때 개안이 되는 것이다.  

일탈의 용기가 필요하다. 생각의 일탈에서 예기치 않는 인생의 빛을 보게 된다. 자신의정해놓은 경계에서 벗어나 보라. 그리고 조금만 더 멀리 나가 보라. 다니던 동선을 바꾸어 보라. 전혀 다른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기울여 보라. 바로 그때 이전에 보지 못했던 세계가 나에게 열려지게 된다.

 

이규현|시드니새순장로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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