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을 주는 패배자

정기옥/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8/02/28 [09:26]
얼마 전에 볼프 슈나이더가 지은 <위대한 패배자>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승리자가 되기 위해 평생을 경주합니다. 아무도 실패를 좋아하고 실패자가 되는 것을 꿈꾸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치열한 무한경쟁의 사회이고 승리의 월계관을 쓰는 사람은 매우 소수입니다. 대부분은 패배의 고배를 마시며 아픈 경험들을 합니다. 심지어는 승리자의 삶 속에도 수많은 패배의 경험들과 패배자로서의 쓰라린 추억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두 극단의 결과물은 인간 경험의 모든 영역에 존재합니다. 정치, 사회, 경제, 문화, 학문과 예술을 비롯해 국가와 같은 큰 단위에서 가족과 같은 소단위, 그리고 개인에 이르기까지 예외가 없습니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 무대의 중앙에서 조명을 받는 사람은 언제나 승리자입니다. 패배자는 쓸쓸히 무대 뒤로 사라져 잊혀집니다. 사람들은 승리자에게 환호를 보내며 그들을 미화시키다 못해 우상화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그 승리자가 지혜롭게 적절한 때에 사라지지 않으면 자칫 자기의 승리를 오욕으로 물들이는 초라한 패배자로 전락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의 이름을 일일이 열거하지 않아도 그들을 더러는 알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정치가도 있고, 유명인도 있으며 심지어는 종교 지도자들도 있습니다.
 
승자의 면류관을 스스로 더러운 시궁창에 던져 넣는 어리석은 승리한 패배자는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우리 주변에 있으며 미래에도 인간의 역사가 계속 되는 한 여전히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패배자 같으나 나중에 보면 결국은 승리자였던 사람들도 역사 속에는 많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승리자라고 반드시 인류에 귀감이 되는 좋은 사람이거나 인격자인 것은 아닌 것처럼 패배자도 우리에게 교훈과 큰 울림을 주는 감동의 사람인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아르헨티나에서 출생해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쿠바 공산주의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었던 전설적인 혁명가 체 게바라를 생각해 보십시오. 이미 거둔 승리와 그 누림을 뒤로 한 채 콩고 혁명 투쟁을 지원하고 다시 볼리비아의 밀림에서 게릴라전으로 혁명을 이끌다가 서른 아홉의 젊은 나이에 정부군에게 사살된 그는 이념을 넘어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패배자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또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전차 군단을 지휘하며 사막의 여우라는 별명을 얻은 독일의 명장  에르빈 롬멜은 적국인 영국인들에게도 경탄과 추앙을 받는 승리자 못지 않은 감동을 주는 패배자입니다.
 
그리고 다른 나라는 해방시켰지만 정작 자기의 제국은 잃어버린 세기의 패배자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이들은 그를 해방자나 승리자로 부르기도 하지만 일각에서는 그를 철 모르는 바보 천치 패배자로 여기기도 합니다. 그는 공식적으로 명시적 패배를 당한 적은 없는데도 불구하고 승리자의 무대에서 패배자의 위치로 내려 앉은 구소련의 대통령입니다.
 
자의던 타의던 그를 통해 냉전은 종식되었고 동구권의 위성국가들은 해제되어 그들에게 자유를 선사했으며 사회주의는 종말을 고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보편적 영웅담에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퇴임과 자본주의의 달콤함을 즐기며 은퇴 후의 삶을 살아간다고 합니다. 복합적 평가를 피해 갈 수 없는 승리자이면서도 패배자의 모습을 동시에 지닌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의 초라한 뒷모습 속에 드리우는 한 인간의 애처로운 패배적 모습이 오히려 짠하게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이런 감동을 패배자가 주는 깊은 여운은 불꽃처럼 화려한 승리자가 주는 부러움과 선망의 마음보다 훨씬 더 오래 갑니다. 아마 많은 사람이 승리자이기보다는 패배자에 더 가깝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상은 승리자를 기억하고 그들이 역사를 써 간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패자 없는 승자가 없듯이 패배자가 없는 역사는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절대 다수에게 위로와 격려를 주고 그들로 하여금 역사의 수레바퀴 속에 끈질기에 붙어 계속 살아가게 하는 힘은 패자들이 주는 감동 때문일 것입니다.
 
더구나 패자가 승자에게 멋지게 승복한 뒤 승자를 향한 축복과 함께 퇴장하는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특별한 감동과 잊지 못할 매력을 선사합니다. 그것도 최선을 다한 깨끗한 패배자의 모습은 그 자체가 이미 승리요 수많은 패배자를 위한 진정한 선물입니다. 그런 성품과 자신감과 용기는 그 자신뿐 아니라 그를 목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새로운 출발과 도전에 대한 신선한 꿈을 꾸게 합니다.
 
최근에 그런 감동을 주는 패배자를 바라보며 심장이 뛰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한국인이면 대부분 알고 있는 한국 테니스의 간판 스타 정현 선수였습니다. 2018년 호주 테니스 오픈 준결승에서 페더러와 격돌했지만 발의 물집이 심해져서 2세트에 기권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감동을 주는 패배자였습니다.
 
정현 군의 어머니는 정현의 어린 시절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린 시절 현이는 공부 잘하는 우등생이었습니다. 책을 많이 읽어서 생각이 깊고 나이에 비해 의젓하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현 군의 어머니는 테니스 감독인 남편과 선수인 장남과는 다르게 운동과는 상관없는 평범한 아이로 키우고 싶어서 공부에 욕심도 부렸습니다.
 
그러나 일곱 살이 된 아이 정현은 자꾼 눈을 찡그렸습니다. 현이의 어머니는 아이와 함께 안과에 갔습니다. 청천벽력같은 소리를 듣습니다. 현이는 약시로 이미 시력이 크게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어머니로서 아이에게 너무 무관심했나 싶어 죄책감까지 들었다고 합니다. 이후로 현이의 엄마는 아이를 위한다는 기준이 바뀌고 자녀에 대한 개인적인 욕심을 버리고 현이의 건강에 최우선 순위를 두었습니다.
 
그때 아이의 눈을 위해 초록색인 것을 많이 보게 하라는 의사의 말에 자연스럽게 남편과 큰 아들이 하는 테니스를 현이에게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체력조건이 뛰어나고 운동신경이 남달랐던 현이는 눈부신 성장세를 보였고 약시도 그의 승승장구를 막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정현은 약시라는 단점을 장점으로 승화시키키게 됩니다. 약시이다 보니 사물을 볼 때 일반인들보다 더 집중하게 되어 움직이는 물체를 보는 시력인 동체시력이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테니스 선수로서는 엄청난 장점이 계발된 것입니다. 
 
정현은 2008년 오렌지 볼 12세 우승을 시작으로 2018년 호주 오픈에 이르기까지 국내 남자 테니스 ‘최초, 또는 최고’라는 수식어를 모두 휩쓰는 패자의 요인을 극복한 승자가 됩니다. 고도근시라는 장애를 넘어 특장화시킬 뿐 아니라 끈질긴 연습광이고 테니스 자체를 즐기는 행복한 정신력과 겸손한 태도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가 멋진 사고의 연타를 친 것입니다.
 
2018년 1월 24일 멜본에서 열린 호주 오픈남자 단식에서 자기의 어린 시절 우상이었던 세르비아의 조코비치를 3대 0으로 꺾고 8강전에서 미국의 샌드그랜을 세트 스코어 3대 0으로 완파하고 준결승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가장 위대한 테니스 선수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스위스의 페더러와 4강전에서 만난 것입니다.

세계 랭킹 58위와 2위의 대결이었습니다.
 
10세 때인 2006년 서울에서 열린 페더러와 나달의 친선 경기에서 볼보이로 참여했던 정현과 대스타의 극적 만남이었습니다. 이 멋진 대결의 자리에 이르기까지 정현은 2개의 복식 경기를 포함해 7 경기를 치렀습니다. 직전까지 메이저 대회에서는 3회전이 최고였습니다.
 
반면 페더러는 메이저 대회 19승에 빛나는 역전의 노장이었습니다. 한 템포 빠른 속사포 같은 공격에 맞서 메디컬 타임 아웃까지 부르며 분투를 했지만 두 발에 생살까지 드러난 물집은 걷기도 힘들 정도가 되었습니다. 결국 2세트 도중 기권을 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정현은 감동을 주는 패배자였습니다. 페더러가 칭찬한 것처럼 정신력은 톱 10감이었고 차세대 선두주자가 분명했습니다. 부상으로 인해 멈추어진 도전이고 받아들여만 하는 패배였지만 부상에도 불구하고 경기에 최선을 다했던 그의 모습은 승자의 광휘보다 더 빛을 발하는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감동을 주는 패배자는 최선을 다한 후 깨끗하게 승복하고 조용히 퇴장하는 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정정당당하게 최선을 다한 패배자는 결코 단순한 패배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감동을 주는 패배자인 것입니다.

정기옥|안디옥장로교회 담임목사, 시드니신학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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