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튜어트 피긴 박사의 호주 복음주의 기독교의 역사 (15)
 
번역 | 홍은희ㆍ정의경
제8장 말씀이냐, 성령이냐?  (1960-1994년) 4편

 
세상에 대한 교회의 입장

교회들은 이 시기 호주 사회를 지배한 세속주의, 물질주의, 개방의 물결을 막는 데 별로 효과적이지 못했다. NSW에 도박 기회가 많아졌고 주일에도 호텔이 문을 열었으며 술집의 개장 시간도 길어졌다. 검열은 사라졌고 포르노가 합법화되었다. 낙태나 동성애를 죄악시하던 분위기도 사라졌다.

SA에서는 감리교가 1973년 빛의 축제(Festival of Light)를 통해 음주문화에 대항했다. 1974년, 프레드 나일이 빛의 축제 NSW 담당자가 되었다. 그는 Melbourne Bible Institute를 졸업하고 1964년 회중교회에서 안수를 받고, 같은 해 노먼 펠의 뒤를 이어 Australian Christian Endea- vour Movement 총재로 임명되었다.

또, 1968년 빌리 그래함 전도단의 시드니 집회 실무를 맡아, 여덟 번의 집회 동안 총 45만 5천 명의 참석과 2만 2천 명의 결신을 이끌었다. 1968년 NSW주 복음주의 회중교회 총재가 되고, 빛의 축제를 활용하여 팻분이나 테레사 수녀 같은 유명 기독인사들이 호주를 방문하도록 주선했다. 1981년에는 Call to Australia Party를 대표하여 NSW주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일부에서는 이를 기독교 근본주의의 정치화라며 우려했지만, 호주는 미국처럼 제도화된 기독교 우파운동이 자리잡지는 못했다.

한편, 캔버라에서는 머브 리(자유당)와 질 더디(노동당)가 1968년 스물다섯 명의 동료와 함께 국회기독인회 Parlia- mentary Christian Fellowship를 세웠다. 이들은 매년 의회개회일에 연합예배를 드리고 미국처럼 조찬기도회를 열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반응은 그리 좋지 못했다. 1988년 5월 9일 새연방국회의사당 완공식은 종교 지도자들의 기도로 시작되었지만, 종교적인 내용은 전혀 없었고, 누구도 국가를 높이는 의에 대한 하나님의 역할을 언급하지 않았고,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이었던 봅 호크 수상 역시 다르지 않았다.

호주에서 보수적 기독교인이 정치에서 인정받기가 어려웠다. 이는 반기독교적 공격 때문만 아니라, 경건주의와 비타협을 특징으로 하는 복음주의자들의 완벽주의적 요구 때문에도 그랬다. 또 하나의 큰 문제점은 복음주의교회 강단이 개인적인 도덕성 이외의 다른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기 꺼려했다. 1988년 NSW주 선거에 나온 양당의 지도자들은 모두 카톨릭 신자들이었다.

 
세상 문제에 대한 복음주의적 참여

1984년 성공회 멜번 대주교로 데이비드 펜맨이 임명되면서, 복음주의자들은 비근본주의적 방법으로 사회적, 정치적 현안을 해결할 기회를 경험한다. 펜맨은 균형 있는 복음주의자의 모범으로, 복음의 사회적 적용에 대한 열정을 가진 지도자였다.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까지, 멜본의 성공회신학교인 리들리 컬리지의 졸업생들은 목사 안수에는 큰 관심이 없고 언론 매체, 약물 중독자 상담,지역 사회 상담 프로그램, 옥외 교육, 예술에 대한 기독교식 접근, 문화 교류 사역 같은 영역에서 신앙과 사회의 상호작용에 관심을 더 많은 갖고 있었다.

파키스탄에서 CMS 선교사로 사역한 경험이 있던 펜맨은 선교에 대한 열정과 다문화에 대한 인식을 결합했다. 전통주의자들과 강한 개혁주의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특히 여성 및 AIDS 환자의 사제 임명을 추진해 대중의 많은 지지를 받았다. 펜맨은 공중보건, 다문화, 외교 업무에 있어서 정부에 많은 조언을 했다. 1989년 그가 갑자기 사망하자 사회 전체가 애도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회개혁을 위해 또 다른 길을 준비하셨다. 1978년 시드니 웨슬리 선교회(Wesley Central Mission)의 감독에 임명된 고든 모이스 목사는 사회정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면서도 모든 사역을 기도 속에서 진행하고 복음주의 전통을 계승하여, 의식적으로 세속주의에 대항했다. 비교적 덜 알려진 이로는 NSW주 침례교 교육학자 고든 영도 한 예다. 그의 어머니는 ‘실패는 죄가 아니지만 목표 의식이 낮은 것은 죄다.’라고 말했다. 그는 어머니의 말씀을 따라, 평생동안 500명 이상 되는 모든 호주 마을에 복음 전도자를 파견하자는 목표를 품었다. 그는 ‘잘못된 신학이 회중을 어디로 이끄는지를 알고’ 있었고 따라서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권고’를 가르치는 교회가 마을마다 최소한 하나 이상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73년에는 이를 위해 Partners with Local Churches를 설립했다. ‘근대주의, 은사주의, 고칼뱅주의, 침례교 내 천주교적 경향(강한 중앙집권주의를 뜻함), 형식주의, 교파주의, 사역자들의 이혼 문제 같은 현대적 사상 등’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리스도의 교회 평신도 전임 사역자였던 존 커티스도 비슷한 확신을 공유했다. 그는 브로큰 힐 지역을 하나님께 드리는 꿈을 품었다. 브로큰 힐은 역사적으로 자존심이 강한 노동 조합이 장악해 온 녹록지 않은 광산촌이었다. 1982년 커티스와 아내 주디는 집을 팔고 또 다른 가정과 함께 수녀원을 인수했고, 코너스톤신학교, 청소년 쉼터, 가정 문제 센터, 사역자를 위한 수양관 등을 세웠다. 당시 늘어나는 실업 청년문제를 위해 2층 버스를 구입하여 이동상담센터로 사용하고, 신학생들의 학비 지원을 위해 피자 배달 사업을 시작했고 곧 마을 전체가 피자를 사먹게 되었다.

또한 라디오 방송국을 인수해 기독인 라디오 아나운서들을 크리스찬으로 행동하도록 훈련하는 교육장으로 사용했다. 가족을 잃고 알코올 중독에 빠진 어느 실업자를 위해 관광용 광산을 구입하여 관리인으로 임명했다.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도움이 필요한 시점에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자 하는 결단은 널리 전파되었다.

 
부흥 : 자유롭게 흘러가는 성령의 강물

복음주의 합성물의 강력한 구현자로 꼽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인물은 제프리 빙햄이다. 빙햄은 1950년대 말 파키스탄 부흥의 경험을 갖고 시드니로 귀환했다. 그러나 완벽주의나 개혁주의계열 인사들은 그를 환영하지 않았다. 마음이 상한 빙햄은 시드니를 떠나 Bible College of South Australia 교장, New Creation Ministries의 이사로 재직하면서 집회와 학교를 통해 사역했다.

1969년 8월, 진정한 자유(Free Indeed)라고 명명된 선교집회가 에이레 반도 우디나에서 개최되었다. 빙햄은 그 곳에서 딘 메터링햄 목사가 시무하는 작은 감리교회에서 집회를 인도했다. 개회 모임에 예상 밖의 인파가 모여 들자 강당으로 모임 장소를 옮겼는데도 상당수는 강당 밖에 서서 창문을 통해 말씀을 들었다.

강론은 인간이 죄와 사탄, 어둠의 권세와 이 세상의 육신에 매여 있음과 그리스도가 이러한 권세로부터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하심에 대한 성경 말씀이었다. 분위기는 고조되었고 듣는 이들의 열심은 진지했으며 전혀 기독교적인 것에 관심이 없는 듯했던 사람들이 많이 참여했다. 인근 전체 지역을 품으시는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졌다.

 트랙터로 밭을 갈다가 강한 부르심을 느낀 한 농부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께 삶을 바치기로 결신했다. 남편으로부터 골초에 욕쟁이로 불렸던 한 여인은 그 버릇을 모두 끊어버렸다. 수년 동안 명목상의 교인이었던 신자들이 눈물과 회개로 용서함을 받았으며 새로운 삶과 상상할 수 없는 기쁨을 얻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집회가 끝난 후에도 30여 분간 자리에서 움직이지도, 한 마디 말을 하지도 않고 경이로움 속에서 앉아 있었다. 방언이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많은 이들은 이 경험을 오순절 다락방의 성령 임재와 같다고 여겼다. 마지막 집회에는 멀리 세두나와 쿠민스에서도 400명이 넘게 참석했다.

우디나의 부흥 후 10년 후 호주 역사상 가장 중요한 부흥이 찾아왔다. 이 부흥은 1978년 말, 엘코 섬(현재 갈리윙쿠)의 연합교회의 원주민 사이에 시작되었다. 지니이니 곤다라 목사는 “…사람들이 꿈을 통해서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고 느꼈다. 어떤 사람들은 그냥 환자들에게 가서 기도하면 치유되었다.” 고 말했다.

1979년 3월 14일, 약 30명의 사람들이 지니이니 곤다라 목사와 함께 모였을 때,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났다. “모인 이들에게 서로 손을 잡으라 하고 이들을 위해, 교회를 위해 하나님께서 성령을 부어 주셔서 모두의 심령을 치유하고 새롭게 하시기를 기도했다. 갑자기 우리 심령에 성령이 움직이심이 느껴지기 시작했고 기도 생활의 형식이 완전히 바뀌어 모두들 성령과 화합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 방 안에 큰 소음이 있어서 서로 무슨 일인가 묻기 시작했다. 우리들 중 몇몇은 하나님께서 이제 우리를 방문하셨고 그의 백성 가운데 다시 한 번 그의 나라를 세우셨다”고 말했다.

매일 밤 집회에 200여 명이 참석했고 어떤 경우는 새벽 2시까지 진행되었다. 이 섬에서 만져주심을 경험하지 않은 이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어느 주말에만 128명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거나 헌신을 재다짐했다. 예배뿐 아니라, 지역 사회에 변화가 일어났다. 술주정, 휘발유 흡입, 싸움이 줄고 일터에서 양심적으로 일하게 되고 사회 부정에 용감하게 대적하기 시작했다. 호주내 다른 부흥과는 달리, 이 사건은 단명하지 않았다.

엘코 섬 사람들은 비행선교단 Missionary Aviation Fellowship의 비행기를 사용하여 아넴 랜드와 호주 북쪽 및 북서부 전역에 복음을 전하고 워버튼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놀라운 부흥이 이어졌다.〠 <계속>

 

copyright ⓒ 크리스찬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입력: 2011/09/26 [15:01]  최종편집: ⓒ christianrevie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