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정지홍/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3/04/29 [11:57]
하나님의 평화는 둘을 하나로 만드는 평화다. 나뉘었던 것이 하나가 되는 평화다. 서로 달랐던 것들이 담이 허물어지면서 같은 하나가 되는 평화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엡 2:14).

이 평화는 힘으로 가능하는 것이 아니다. 힘에 의한 평화, 무력에 의한 평화는 결코 하나로 만들 수가 없다. 유엔의 평화유지군의 가치가 정말 세계 평화를 위한다고 해도, 그들의 무력 진압을 통해 얻어진 평화는 서로를 하나로 만들 수가 없다. 그 전장의 현장에는 분노와 죽음과 상처의 비참한 현실만이 남기 때문이다. 비록 전쟁을 끝내고 평화의 협정을 맺는다고 해도, 그 둘 사이가 하나가 되지는 않는다.

더욱이 전쟁에 의한 평화로는 누구도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수가 없다. 만일 그렇다면, 인류의 역사 가운데 무력을 통해 당대의 평화를 이룩했던 카이사르, 알렉산더, 징기즈칸 등과 같은 전쟁의 영웅은 모두 하나님의 아들로 불려야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 중 누구도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들이 이룩한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화평의 사람 

예수님은 화평하게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peacemaker,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다. 이 땅에는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수도 없이 많다. 평화를 외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대부분의 정치가들은 세계 평화를 외치는 평화주의자들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 또 평화를 외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peacemaker,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생각으로만 평화주의자가 아니라, 내 손과 발을 통해 화평하게 만들어가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이다.

그저 말로만 평화를 외치고, 마음으로만 평화를 사랑해서는 이 땅에 참된 화평을 이룰 수가 없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peacemaker가 될 수 있을까? 무엇보다 먼저 화평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세상에 화평을 주고, 화평을 만들어가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화평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 안에 화평이 있어야 나를 통해서 화평이 세상으로 흘러갈 수 있다.

어느 공동체든 두 종류의 사람을 볼 수가 있다. 한 종류는 그 사람이 가는 곳에는 언제나 분쟁이 있다. 그 사람만 나타나면 다툼이 있고 시기가 있고 남을 험담하는 분위기가 되고 만다. 그런 사람들의 입에서도 종종 정의가 나오고 윤리가 나오고 인격에 대해 말하지만, 정작 그 공동체는 평화롭지가 못하다. 왜 그런가? 그 사람이 화평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나타나기만 하면 화기애애해 지고 마음이 훈훈해지고 따스해진다. 그 사람의 입에서는 거친 말투나, 남을 해코지 하는 험담을 찾아볼 수가 없다. 그 대신 칭찬과 격려 그리고 위로와 긍휼의 언행이 가득하다. 그래서 그 공동체에 웃음이 꽃피고 사랑이 흘러나오는 잔잔한 화평이 이루어진다. 왜 그런가? 그 사람이 화평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사람 안에 화평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을 할 때에도, 행동을 할 때에도, 사람을 대할 때에도 언제나 화평이 흘러나온다. 
 

예수님을 품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화평의 사람이 될 수가 있을까? 예수님을 품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화평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를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눅 2:14)였다. 그래서 성탄의 의미는 평화다. 성탄뿐만이 아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목전에 두신 예수님께서는제자들에게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요 14:27)고 하셨다. 

십자가의 참극 앞에서도 예수님의 마음은 고요하고 평안했다. 그분이 평화의 주님이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자들을 향해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그러니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다. 평화의 사람에게는 근심도 두려움도 없습니다. 내 안에 평화가 가득하다면 염려하거나 걱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막상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자 제자들은 두려워졌다. 예수님을 잃어버리자 화평도 잃어버렸다. 그래서 다락방에 숨어서 밖으로 나오지도 못했다. 그렇게 사흘을 숨어지냈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이 죽음을 깨뜨리시고 사흘째 되는 날 부활하셨다. 그리고 다락방에 숨어 있는 제자들을 찾아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라고 하셨다.

예수님을 잃고 난 제자들은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한 채 어둠 컴컴한 다락방에 숨어 있었다. 평화를 잃어버린 그들은 다락방 문을 굳게 닫고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 그런 그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다. 평화의 주님이 나타나셨다.

주님은 그들에게 “왜 나를 배신하였느냐. 그러고도 너희들이 내 제자더냐”라고 책망하시지 않았다. “왜 두려움에 떨고 있느냐”라고 꾸짖지도 않으셨다.

예수님을 잃고 평화도 잃어버린채 두려움에 떨고 있던 그들에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손에 난 못자국과 옆구리에 찔린 창자국을 보여주셨다. 그제서야, 제자들은 기뻐할 수 있었다. 평화가 임한 것이다. 예수님이 오시자 평화도 임했다.

예수님의 탄생과 함께 이 땅에 평화가 임했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자 제자들에게 평화가 사라졌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두려움이 가득했던 다락방에 다시 평화가 임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우리가 화평의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품어야만 화평의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peacemaker의 시작이다. 
 

희생이 화평을 이룬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고 해서 모두가 곧바로 화평하게 하는 사람, peacemaker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제 시작일 뿐이다. 아직 화평을 이루지는 못했다. 그러면 무엇을 통해서 우리가 화평을 이룰 수 있을까? 예수님을 믿고 화평의 사람은 되었는데, 이제 무엇으로 우리가 우리의 가정, 우리의 교회, 이 세상에서 화평을 만들어갈 수가 있을까? ‘희생’이다.

희생이 없이는 화평을 이룰 수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화평의 씨앗을 뿌렸다면, 우리의 희생을 통해 화평을 이루어가야 한다. 희생의 땀과 희생의 눈물을 흘릴 때, 화평의 열매를 맺을 수가 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대로 이방인을 위한 사도다. 이방인이란 유대인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런데 바울은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 즉 순수혈통을 지닌 유대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방인들을 위해 복음을 전하고 이방 지역에 교회를 세우고 이방의 말로 성경을 기록하며 온 지중해 세계를 누볐다. 바울은 이방인들을 위해 철저하게 자기 희생을 했다. 자신의 젊음, 자신의 시간, 자신의 물질, 자신의 지식을 이방인들에게 쏟아부었다.

이방인들에게 무슨 대단한 영광이나 대가를 바라고서 그같은 희생을 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바울이 희생하면 희생할수록, 이방인들에게 붙들려서 매도 맞고, 조롱을 당하고, 이방의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결국 이방 세계의 중심 로마에서, 이방세계 최고의 권력자 로마황제의 지시로, 이방인의 손에 의해 참수형을 당하고 말았다. 이방인들을 위한 바울의 희생이 물거품처럼 끝나는 것 같았다. 당시에 역사가들의 눈에는 비극적인 폭력만이 남아 있고 바울의 희생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이 났는가? 그렇지 않다. 바울의 죽음의 희생 이후에 바울의 손에 의해 세워진 교회들을 통해 이방 세계에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갔다. 평화의 나라가 확장되어 갔다. 그리고 마침내 313년에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가 공인되었다. 로마 황제의 권력도, 로마의 최강의 군대도 가져다 주지 못한 주님의 평화가 바울 한 사람의 희생을 통해 이방 세계에 임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이다.

우리도 희생해야 한다. 이기심, 자존심, 내세움, 자기 이익을 희생해야 한다. 내가 먼저 겸손하게 희생해야 한다. 그때 우리의 희생을 통해 가정도 교회도 세상도 평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희생하는 자가 평화를 이루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게 될 것이다. 〠


정지홍|좋은씨앗교회 담임목사 blog.daum.net/goodseed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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