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김훈/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5/03/23 [14:35]
Q 기독교인에게 있어 용서는 명령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쉽지 않아요. 더욱이 가까운 사이라서 피할 수도 없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요? 바람직한 용서는 어떤 것인가요? 방법 좀 알려주세요. 
 
A 주기도문에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중의 하나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는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명령인 용서는 심리학적으로나 의학적으로도 우리를 건강하게 하고 행복하게 한다는 것이 과학적인 방법으로 증명되고 있습니다. 플로리다병원과 스탠포드 의과대학에서는 용서와 분노가 건강에 미치는 결과를 8주의 용서 프로젝트를 통해 연구했으며 용서를 실천했을 때 사람들의 건강과 삶이 눈에 띄게 개선된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용서에는 기술이 필요합니다. 용서의 기술을 쓴 딕 티비츠 박사는 용서함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경고를 합니다.
 
첫째, 너무 빠른 용서는 도피의 수단이 될 수 있습니다. 일시적으로는 고통으로부터는 해방될 수 있지만 여전히 바르게 해결되지 않은 문제로 인해 지속적으로 고통을 당할 수 있습니다.
 
둘째, 상대보다 우위에 있는 용서는 진정한 용서가 아닐 수 있습니다. 단지 행세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유익이 없는 용서인 것입니다. 진정한 용서는 열등감이 아닌 동등함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셋째, 용서를 복수의 수단으로 삶아서는 안됩니다. 상대로 하여금 비참함을 경험케 하는 용서는 진정한 용서가 아닙니다.
 
넷째, 감정의 문을 닫아버리는 용서는 미워하는 마음뿐 아니라 사랑의 감정까지 닫아버리게 되기에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울증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다섯째, 용서라는 이름으로 희생해서도 안됩니다. 자신을 무력하게 만들고 하찮게 여기는 용서는 무가치합니다. 오히려 상대가 자신을 함부로 취급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비굴한 것이 아니라 단호하고 관대한 행동입니다. 상대가 죄책감을 보이지 않는다면 그 용서는 무가치한 것입니다.
 
여섯째, 사회적 압박으로 용서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용서는 철저히 본인 혼자서 스스로 결정하는 선택으로 강요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일곱째, 남을 대신해서 하는 용서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일에만 용서를 베풀 수 있습니다.
 
용서에는 다양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어떤 것은 빨리 용서가 되지만 어떤 것은 수년 이상이 걸리기도 합니다. 상처가 깊을수록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장시간이 걸리더라도 용서의 과정에 있어서 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는 늘 확인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무조건적으로 용서하시고 기억조차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상처 준 사람의 죄를 기억하지 말고 조건 없이 용서해야 하지만 우리는 한계가 많은 인간이기에 용서를 함에 있어 기술적인 부분이 필요합니다.
 
용서는 너무도 아름답고 좋은 것인데 부적절한 방법이나 잘못 사용된 용서를 통해 더 큰 상처와 후회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밀양’이라는 영화를 보면 용서가 어떻게 오용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너무나 큰 상처를 한 번에 쉽게 용서해버리는 주인공을 발견하게 됩니다. 물론 결과는 부정적이었죠.
 
하나님께서 축복의 도구로 주신 용서를 잘 이해하고 효과적으로 잘 활용함으로써 과거에 묶여 있지 않고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며 건설적인 미래를 추구해 나가시길 바랍니다.〠

김훈|호주기독교대학 학장, 기독교상담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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