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 에페소 엔 크리스토로 이원론을 극복한다

최성은/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5/05/26 [12:42]
플라톤이 이 세계를 이데아계와 물질계로 구분하여 인식한 것은 당시로는 놀랄 만한 일이었다. 그것은 스승 소크라테스의 인식론을 진일보시킨 탁견이었다. 그의 이데아론을 간략히 말하면 이런 것이다. 세상은 물질계와 이데아계로 나누어져 있다.
 
지금 우리가 보고 느끼고 아는  모든 것은 물질계에 속한 것인데 그것은 이데아의 그림자일 뿐 실재가 아니다. 물질계는 일시적이며 항상 변하고 온전치 못한 반면 이데아는 영원하고 불변하며 완전한 실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질계에 연연하지 말고 언제나 이데아계를 지향해야 한다.
 
플라톤의 말은 이원론의 원조가 되었다. 이원론(Dualism)이란 서로 대립된 두개의 원리를 가지고 모든 현상을 설명하는 것이다.  자기가 원인을 제공한 이론이 다음 세대에까지 살아남아 엄청난 영향을 미치리라고는 자신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더욱이 기독교 신앙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리라곤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과 공동서신의 저자들, 영지주의자들, 신 플라톤 주의자들, 어거스틴, 토마스 아퀴나스, 루터와 칼빈, 현대신학자들의 저작들을 살펴보면 빛과 어두움, 하늘과 땅, 자연과 은총, 계시와 이성, 그리스도와 문화, 교회와 국가 같은 대립되는 두 개념 사이에서 때로는 이원론을 고착시키려는 시도와 혹은 그것을 극복하려는 몸부림이 얼마나 치열하게 전개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신학자들이나 철학자 같은 전문적인 영역에 있는 분들은 말할 것도 없고 평범한 소시민들에게도 이원론은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이원론은 세상을 이 세상과 저 세상으로 나눈다. 이 세상은 속되고 무가치하며 마음을 주어서는 안 될 곳이다. 자연스럽게 세상을 경계하여 기피하고 도피하게 만들어 염세주의자가 되게 한다. 교회 안에만 머물게 하고 세상과는 담을 쌓게 만든다.
 
그러면서 금욕을 부추긴다. 육체를 악한 것으로 정의하였으니 그 육체가 원하는 것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악이다. 금식을 밥먹듯이 하고 문화를 배격하며 성생활을 멀리한다. 동시에 합리적이고 객관적인 연구를 통해 진리의 깨달음에 이르려 하지 않고 주관적이고 신비한 경험과 환상에 의존한다. 이성을 신앙의 적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터툴리안이 남긴 아래의 인용문은 필자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정확히 대변하고 있다.  <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느뇨. 아카데미와 교회 사이에 무슨 조화가 있느뇨. 우리의 가르침은 솔로몬 행각에서 나왔느니라. 저 스토아주의는 무엇이고 플라톤은 무엇이뇨. 모두 물러가라 우리는 다른 믿음이 필요치 아니하느니라>.
 
주님은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동시에 다스리는 왕이시다. 주님은 우리를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 하셨다. 주님은 이 세상에서의 삶이 저 세상에서의 상급을 결정한다고 하셨다. 주님은 오히려 이 세상에 더 비중을 두셨다. 그러므로 세상을 기피하여 게토 속에 몸을 감추거나 금욕으로 즐거움을 소멸하거나 배격으로 문화를 등한시하는 일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플라톤의 인식은 성경적이지 않다.
 
최근 K 목사님과의 사귐을 시작했다. 목사님의 표현을 빌리면 자기는 하루 종일 에베소서만 생각한다고 한다. 이에 도전을 받고 나도 지난 주일부터 에베소서 강해를 시작했다. 편지 서두에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고 있다.
 
엔에페소(en Epheso)! 엔 크리스토(en Christo)!
이원론의 극복을 고심하던 내게 <에베소에 있는> 이라는 문구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이라는 문구는 한줄기 빛으로 다가왔다. 무슨 말인가. 우리는 에베소라는 도시에 살고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 사는 성도들이다.
 
그러므로 에베소에서의 삶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은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어느 한곳으로 기울어 지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한다. 에베소에 사느라 골몰한 나머지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 희미해지거나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에 치중하느라 에베소에서의 삶을 소홀히해서는 안된다. 존 스토트의 표현을 빌린다면 우리는 두 왕국의 삶을 모두 충실히 살아내야 하는 것이다.
 
<엔 에페소>에서 이루어지는 가정생활, 직장생활, 문화생활, 사회생활에 충실할 뿐 아니라 <엔 크리스토>에서 이루어지는 신앙생활도 알차게 하여 둘 사이에 아름다운 조화와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우리의 이원론적 태도는 제대로 극복되어 질 것이다.〠
*엔 에페소 엔 크리스토는 엡 1:1 원문을 한국어로 그대로 옮긴 것이다.

최성은 시드니선민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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