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토텔레스는 땅을 가리켰다

최성은/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15/06/29 [11:02]
라파엘로 산죠의 그림 <아테네 학당>에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와 함께 58명의 철학자들이 등장한다. 라파엘로는 그들의 학문적 특징을 얼굴표정, 자태, 옷의 색갈, 손가락과 시선의 방향 등을 통해 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그 그림의 중앙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그려져 있는데 플라톤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을 가리키고 있다. 이는 플라톤이 하늘의 이데아계를 지향하는 이상주의자라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땅에 뿌리를 박고 있는 현실주의자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들고 있는 책은 아들 니코마코스가 편찬한 <윤리학>이다.
 
플라톤의 제자이며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이기도 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주전 384년 마케도니아의 스타게이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마케도니아 왕실의 시의로 활동하던 의사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우주론, 동물학, 생물학 등 자연과학 분야에 탁월한 식견을 보인 것은 순전히 아버지의 영향이다.
 
17세 때 아테네로 건너가 아카데미아에 입학하였고 거기서 약 20년간 플라톤의 가르침을 받았다. 스승이 죽은 후 아카데미아의 소유권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주어지자 마케도니아로 돌아가 알렉산더의 교사가 된다. 그가 알렉산더에게 어떤 가르침을 베풀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선물로 준 <일리아스>를 알렉산더는 늘 곁에 두고 애독하였다고 한다. 알렉산더가 페르시아 원정에 나서는 것을 보고 아테네로 돌아온 아리스토텔레스는 조용한 숲이 있는 마을 리케이온에 학교를 세우고 인재양성에 주력한다.
 
그의 수업은 교실이 아니라 숲 속에 난 길을 산책하며 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후세의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소요학파(Peripatetics) 라고 이름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알렉산더가 갑자기 죽자 아테네에는 반 알렉산더 기운이 맹렬했는데 한때 알렉산더의 스승이었다는 이유로 그도 신변의 위협을 느낀다. 그래서 아테네 시민들이 또 다시 철학자를 죽이게 할 수 없다는 말을 남기고 조용히 아테네를 떠나 인근 도시에 몸을 피하여 있다가 주전 322년 그곳에서 죽는다.
 
그는 이론과 실천과 예술부문을 넘나드는 수많은 책을 저술하였는데 그의 문장력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키케로는 <그의 글은 황금이 흐르는 강과 같다>고 찬탄하였다.
 
그의 사상은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비판하여 모든 형상은 질료에 내포되어 있음을 논증하는 것에 집중되어 있다. 이를 위하여 그는 4가지 원인을 들어 설명하는데 곧 질료인, 형상인, 창조인, 목적인이 그것이다.
 
예를 들어 목수가 책을 읽기 위해 머릿속에 그린 책상을 나무로 만든다고 할 때 나무는 질료인이고 머리속에 그린 책상은 형상인이며 목수는 창조인이고 책을 읽기위해는 목적인이다. 창조인과 목적인은 형상인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으므로 모든 존재는 형상과 질료의 결합이며 가능성(질료)이 현실성(형상)으로 발전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리고 질료에는 수동성을, 형상에는 능동성을 부여함으로써 운동의 시작과 목적을 형상에 귀착시켰다. 그는 운동의 시작으로써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것을 움직이게 하는 <부동의 원동자>를 신으로 보았다.
 
이는 관념론과 유물론의 합리적인 조합이라는 점에서 스승의 인식을 진일보시킨 것이었으나 플라톤이라는 거장의 위명이 워낙 관심을 독점한 까닭에 그의 견해는 사람들의 주목을 끌지 못했고 자연히 비주류의 위치에 있으면서 동방교회나 이슬람 신학의 도움 속에 겨우 명맥을 유지하다가 800년~1400년 어간의 중세시대에 카톨릭 교회를 근간으로 하는 스콜라철학을 만나면서 화려하게 재기한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호에서 이어가기로 하자.〠

글/최성은ㅣ시드니선민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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