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와이트 L. 무디
 
고준학/크리스찬리뷰
▲ 드와이트 L 무디    


미국에서 스펄전을 가장 열렬히 찬양하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는 뉴잉글랜드 출신이었는데, 그는 세계 복음전도에서 또 다른 걸출한 인물이 되었다.

1867년, 이 미국인이 처음으로 영국에 여행왔을 때, 그가 맨 처음 향한 곳이 메트로폴리탄 태버너클이었다. 그는 대서양 양안에서 그 시대의 가장 유명한 복음전도자가 되었다. 그의 이름은 드와이트 L. 무디였다.
 
스펄전이 출생한지 3년 뒤인 1837년에 태어난 무디는 17살 때 삼촌의 구둣가게에서 일하려고 보스톤으로 온 이후 회심을 경험하고 나서 한 회중교회의 신자가 되었다. 2년 뒤 다시 시카고로 가서 구두 세일즈맨으로 성공했고, 신앙부흥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종국에는 YMCA의 전국 총회장이 되었다.
 
어린이들과 함께 한 주일학교 사역은 무디가 목사로서 사역한 교회를 설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복음성가 가수인 아이라 D. 생키를 동반하고서, 자신의 단순한 복음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 열정을 갖고 방문한 도시들을 감동시켰다.
 
1874년 영국의 글래스고에서는 3천 명이나 되는 회심자들이 있었다. 그 다음 해 런던에서는 미국의 복음전도자들이 설교하는 4곳 중 한 장소에서만도  정기적으로 1만 2천 명의 청중을 끌어들였다.
 
미국으로 돌아와서 무디와 생키는 브루클린부터 시작해서, 영국에서의 도시 선교와 유사한 일련의 도시 선교사를 지휘했다. 우선 현대 음악당으로 달려가 생키가 먼저 독창을 하고 회중의 노래가 곁들어진 복음전도 방식이었다.
 
복음전도 집회가 끝난 뒤에 구원을 찾는 사람들은 개인적인 상담을 받았는데, 이 상담으로부터 성과의 약 5분의 4가 나온다고 평가되었다. 무디는 몸가짐이 활발했으며 성격도 매력적이었다.
 
체격이 스펄전과 다르지 않은, 키가 작고 땅딸막하며 수염을 기른 이 복음전도자는 거리낌이 없었지만, 기도 집회를 고무시키는 만큼이나 아이 같은 장난기를 즐겼다. 그는 진정한 겸손을 보여주었는데 어떤 개인숭배도 찬성하기를 거부해서, 선전하기를 위해 자신의 사진들을 사용하는 것을 금했다.
 
무디의 연설 방식은 어린이들에게 연설한 그의 초기의 경험에 의해서 형성됐는데, 스토리텔링(storytelling)에 큰 자리를 부여했다. 성경의 인물들이 그의 입술에서 되살아났다. 그는 설교 듣는 사람들 각자를 위해서 성경에서 주제를 선택하는게 특징이었는데 다양한 다른 구절들을 찾으려고 성경을 세밀히 조사했다. 
 
그는 관련된 착상이 떠오를 때마다 종이에 적어서 적절한 봉투에 추가했다. 그는 얘기하기 전에 이야깃거리들 중 몇 개를 골라서 그것들을 정리하고, 또 몇 개를 적어 놓고서 생각들을 결부시키곤 했다.
 
그 결과 동일한 주제에 관한 설교들이라도 종종 매우 달랐다. 비록 한 설교를 여러 차례 할 수 있을지라도, 그 설교는 항상 신선했다.
 
무디의 리버풀 부흥회에 참여해서 많은 경험을 쌓은 사람들이 시드니로 이주했다. 거기서 그는 개인 전도를 위해서 젊은이들을 동원하는데 착수했다. 
 
미국에서는 무디의 설교와 학생자원 봉사자 운동인 노스필드 그룹과 그가 훈련한 기독교인 사역자들을 통하여 그는 20세기까지 길게 이어져오는 보수적인 복음주의의 도정을 정했다. 그의 으뜸가는 기관 유산으로서, 시카고의 무디 성서학원(Moody Bible Institute)은 세계 대전 사이에 근본주의의 요새가 되었다.
 
스펄전과 무디가 상징하는 이 운동은 활기찬 역동성을 지녔다. 이 운동의 신봉자들은 성경의 가르침에 자극을 받았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선포하기를 열망했다. 그리고 그들은 회심을 추구하는데 지칠 줄 몰랐다. 따라서 그들은 복음의 전파에 헌신적인 활동가들이었다.
 
복음주의는 시작은 미약했지만 크게 성장해서 불과 1세기 만에 강력한 힘이 되었다.〠

고준학|시드니유니온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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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07/25 [12:34]  최종편집: ⓒ christian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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