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을 바꾸는 비법

엄상익/크리스찬리뷰 | 입력 : 2024/01/26 [11:24]

 

1977년 겨울이었다. 나는 깊은 산 속의 폐허가 된 절의 한 방에서 같은 처지의 고시생과 함께 공부를 하고 있었다. 석가래가 주저앉고 기울어진 지붕에서 기와가 떨어져 내리는 절이었다.

 

스님들은 절을 떠나고 보살이라고 불리는 할머니가 새벽이면 목탁을 치면서 염불을 했다. 신기(神氣)가 있어 보이는 분이었다. 우리 둘은 그 할머니한테 밥을 얻어먹었다.

 

어느 날 저녁 그 할머니는 붉고 푸른 이상한 그림들이 그려진 고서(古書) 같은 책을 들고 우리 방으로 들어오더니 운명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그 할머니는 우리 두 명의 사주를 묻더니 그 그림이 들어있는 책을 들추면서 뭔가를 찾았다. 그 할머니가 나와 함께 있던 고시생에게 말했다.

 

“너는 내년에 고시에 붙고 판사가 되겠다.”

 

그 할머니는 반면 내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합격이 되지 못할 운명이라는 뜻이었다. 그 할머니는 그 책의 한 부분을 내게 펼쳐보여 줄 뿐이었다. 화투장같이 붉고 검은 섬뜩한 느낌이 드는 그림들이었다.

 

그림 속에 장례식 장면이 보였다. 그 아래에는 77세에 하체의 병으로 임종을 맞는다는 말이 나와 있었다. 나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 같았다. 그 옆에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때의 모습이 나와 있었다. 점쟁이였다. 조선시대 같으면 나의 직업이 과거급제한 관리가 아니라 점쟁이라는 것이었다.

 

실망감이 들면서 인간의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는 내게 서울법대를 나온 사람들도 고시 낭인이 되어 일생을 헛되게 보내는 사람들이 많은데 네가 시험에 되겠느냐고 말한 적이 있다. 나의 능력 부족을 말했다. 아버지도 중학교 대학시험에 일차에서 떨어졌다.

 

작은 아버지는 과거에 급제하는 집안이 따로 있지 우리 집안에서 되겠느냐고 했다. 아버지도 작은 아버지도 조상들도 대대로 가난한 집안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두 달 정도 흐른 어느 날이었다. 갑자기 고시공부가 싫어졌다. 외롭고 쓸쓸한 그 생활에 속에서 신물이 올라올 정도로 거부반응이 일어났다. 나는 책보따리를 싸서 도망치듯 그곳을 떠났다. 갑자기 마음속의 어떤 프로그램이 작동되는 것 같았다고 할까. 같이 공부하던 친구는 ‘조금만 더 참지’라고 말하면서 안타까워 했다.

 

그 다음 해 봄 그 친구는 고시에 합격하고 판사가 됐다. 시험을 포기한 나는 군대로 들어갔다. 그게 나의 운명인 것 같았다.

 

몇 년 후 최전방에서 허리까지 눈이 쌓인 벌판에서 밤새 순찰을 돌다가 새벽녘에 사무실에 돌아왔을 때였다.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성경책이 있었다. 사회에서 전도용으로 보낸 책이었다.

 

아직 종교가 없던 나는 무심히 몇 장을 들춰보았다. 거기에도 운명론이 들어있는 것 같았다. 집안에는 금 그릇 은 그릇도 있지만 허드렛일에 쓰는 막 그릇도 있다는 것이었다. 금 그릇이 안된 걸 원망하지 말고 자기 그릇을 알고 그 주제에 맞게 살라는 내용 같았다. 맞는 말 같지만 순응이 될 것 같지 않았다.

 

연극에서 친구는 왕의 배역을 받고 나는 엑스트라인 문지기역을 맡을 때 감사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운명에 순응하는 게 진리지만 인간적으로 그게 되지 않았다.

 

일 년 후 여름의 어느 날이었다. 밤하늘에 별이 총총하게 떠 있었다. 아직 종교적인 믿음이 없을 때였다. 갑자기 인간의 운명을 지배한다는 하나님에게 기도를 하고 싶었다. 타고난 운명은 어쩔 수 없더라도 마음의 상처는 없게 해주셔야 하지 않겠느냐고 따지고 싶었다.

 

서러움에 울컥하고 눈물까지 났다. 나는 간절하게 기도했다. 마음의 상처만 치료해 주시면 아무것도 욕심내지 않겠다고 했다. 가난이라는 숙명도 견디겠다고 했다.

 

삶을 돌이켜 보면 나는 그때의 간절한 기도가 내 속에 입력된 기존의 악성 운명프로그램에서 벗어난 것 같다. 그 후 성경을 열심히 봤다.

 

그 속의 프로그램이 나에게 복사되어 오고 그 에너지가 전기같이 전해져 왔다. 길을 가는 사울이라는 남자에게 예수의 영이 나타난다. 그리고 그의 운명이 백팔십도 바뀌었다.

 

세상적인 욕망이 가득 프로그래밍되어 있던 제자들에게 성령이 들어가는 순간 그들에게 입력되었던 것들이 모두 지워지고 새로운 프로그램이 깔리는 것 같다고 할까. 나의 절실한 기도는 그런 성령을 불러들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인간의 운명이란 태어나기 전에 깔린 프로그램 같다는 생각을 해 본다. 무의식 속에 그 프로그램들이 입력되어 있다.

 

나는 악성 프로그램들을 다 지우고 초기화한 상태에서 다른 프로그램을 깔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내 영혼에 하나님의 영이 덮여 깔리고 전기같이 그 에너지가 옮겨져 오는 것이다.

 

예수가 밤중에 찾아온 니고데모라는 부자에게 다시 태어나라고 했던 것은 그런 의미는 아니었을까.〠

 

엄상익|변호사, 본지 한국지사장

▲ 엄상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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