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아도 가야할 길

현지 의료진이 스스로 서는 그날까지

글|김명동, 사진|권순형 | 입력 : 2015/12/28 [14:06]
▲ 헤브론병원은 매일 새벽 3-4시경부터 진찰을 받기 위해 환자들이 몰려와 장사진을 이룬다.     © 크리스찬리뷰

 
캄보디아 헤브론병원에 대한 소식이 은은한 향기처럼 번져왔다. 한국 의료선교사들이 연합하여 세운 선교병원이며 무료병원이라 했다. 각기 다른 곳에서 파송을 받은 선교사들이 힘을 합쳐 결실을 맺은 것은 캄보디아는 물론 세계 어디서도 보기 힘든 사례다.
 
믿음의 토양 속에서 뿌리가 제대로 내려주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지켜보기 시작했다. 신앙이 순결한 자원봉사자들이 싱그러운 희망을 안고 모여들었고, 의료선교사들도 다른 세상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순전한 분들이, 세상이익은 간단히 버리고 모여들었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무료병원’ 입소문은 금방 퍼졌다. 전국에서 모인 환자들이 줄을 이었다. 프놈펜에 큰 병원이 있지만 최소 15-20달러는 있어야 하니 살이 썩어가고 뼈가 부러지고 열이 펄펄 끓어도 병원에 갈 엄두를 못내는 빈민층들이 100km, 200km 떨어진 곳에서도 찾아왔다. 맨바닥에 사람들은 새벽부터 쪼그리고 앉아 마냥 순서를 기다렸다. 
 
▲ 헤브론병원 부원장 이철 선교사(마취통증과)     © 크리스찬리뷰
 

8년이 지나는 동안 헤브론병원은 연간 5만여 명의 환자가 건강을 찾는 의료시설로 성장했다. 병상 70개, 3개의 수술실을 갖췄다. 한국인 의사가 10명이고 캄보디아인 의사가 11명이다. 한국인 선교사 및 봉사자가 35명, 캄보디아 직원도 80여 명이다.
 
헤브론병원을 취재하면서 확인되는 한가지 한가지마다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지만 그 중 감동적인 것은 캄보디아인들이 저희들을 찾아준 은인, 한국인 선교사들에 대하여 그토록 지극하게 존경을 나타내주는 그 자세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캄보디아 의료진들과 직원들은 물론 환자들도 마주치면 활짝 웃는 얼굴의 반가운 인사, 누가 되었건 그들은 활짝 웃었고, 두 손을 합장하며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저희들에게 인술을 베풀어주는 한국선교사들에 대한 존경의 뜻으로 읽혔다.
 
그리고 세상에! 총총한 눈! 눈! 눈! 그들은 예배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삶에 대한 신비를 더 알고자 하여 눈을 빛내고 있었다. 일찍이 이렇게 신선한 분위기를 만나본 일이 없었다. 박수를 치고 기도하며 아멘을 소리쳐 외치고 그들은 감동에 인색하지 않았다.
 
감동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위한 기쁜 수확이다. 그들은 그 수확을 놓치지 않았다. 빠르게 반응하며 유쾌하게 구김살 없는 웃음을 자주 웃었다. 사람을 향해 웃어주는 것, 이보다 더 큰 기도가 또 있을까.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런 이러한 장면이 왜 그렇게 감격스럽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던지.
▲ 헤브론병원은 매일 아침 큐티로 시작된다. 김우정 선교사가 인도하는 선교사 큐티 시간,     © 크리스찬리뷰
 

그리고 아아, 한국인 자원봉사자들과 의료진 또한, 현대라는 탁류를 거슬러 하늘나라의 목욕물로 목욕재계한 분들이랄까. 미국에서, 캐나다에서, 호주에서, 한국에서 안정된 터전을 뿌리치고 이곳 프놈펜 헤브론병원을 찾아온 분들이다. 한분 한분의 얼굴에는 정말 믿어지지 않을 만큼 속기가 묻어 있지 않았다. 그저 잠깐 만날 사람들이 아니었다. 두고두고 만나도 여일했다.
 
이러한 선교사들과 이러한 캄보디아인들이 함께 살고 있는 헤브론병원의 분위기는 한마디 말이나 글로 표현하기 어려운 신비스러움에 감싸여 있었다. 현실적인 어려움을 겪어도 이 병원을 감싸고 있는 사랑의 끈은 느슨해지는 일이 없었다.
 
기자는 이 천국의 풍경에 감동하여 어쩌지 못했다. 그 불꽃은 어디에서 생긴 것일까? 그 기쁨, 당당함 그리고 경건과 겸손... 그 모든 것은 어디서 시작된 것일까.
 
하나님이 일하시는 병원
 
헤브론 가족들은 큐티에 참석하는 것부터 진료의 시작으로 삼는다. 빡빡한 일정에 큐티는 굉장한 헌신을 필요로 한다. 의료진들에겐 쉼 없이 수술과 진료를 수행하는 고된 작업장이다. 그러기에 영적 충전은 필수적이다.
 
눈물과 땀과 부르짖음으로 다져지는 큐티는 매일 아침 7시 30분에 시작한다. 큐티 이후 8시부터 30분은 250-300명의 환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린다. 말씀을 전하고 기도를 하며 자연스럽게 전도한다. 예배시간이 아니더라도 심장수술을 해야 하는 등 특별한 케이스의 환자에게는 개별상담을 하고 말씀을 전한다.
 
그리고 병이 더 중한 경우에는 집을 심방해 처한 상황을 살피며 기도하고 말씀을 전한다. 한 사람 한 사람 기막힌 사연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많고 육체뿐만 아니라 마음의 병이 든 사람도 많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의사와 환자’로만이 아닌 인격과 인격이 깊이 만나 사랑하고 섬기려고 노력하고 있다.
 
사실 많은 선교병원들이 초기에는 선교병원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여 의료선교기관으로서 많은 업적들을 남겼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설립목적이 점차 불분명해지기 시작했다. 결국은 병원이 영리사업으로 전락한다거나 문을 닫는 선교병원이 속출하고 있다. 
 
▲ 캄보디아 의사들의 큐티와 컨퍼런스     © 크리스찬리뷰
 

그래서일까. 헤브론 가족들은 큐티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모든 일의 중심에 ‘말씀’이 놓여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말씀 읽기와 묵상을 통해 자신들이 여기까지 왔듯이 헤브론병원의 사역도 큐티를 통해 계속적으로 전개돼 나가야함을 그들은 믿고 있었다.
 
이철(53. 부원장, 마취통증의학과 전문의) 선교사도 이 점을 분명히 했다.
 
“한국선교병원들이 고민하고 기도제목으로 내놓는 것이 선교병원으로서의 정체성과 자립입니다. 헤브론병원은 선교병원이라는 자부심과 정체성을 가지고 지난 세월동안 의료 활동을 펼쳐왔습니다. 그런데 기존의 선교병원들을 보면 규모가 커지면서 그 본래의 의미가 퇴색되고 해야 할 역할들을 잊어버리는 것 같아요.
 
그래서 헤브론병원은 하나님이 주신 선교병원으로서의 정체성을 재확인하며 선교가 우리의 분명한 사명임을 잊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이 영적충전이고요.
 
여기에 자립을 어떻게 이루어 갈 것인가 관심을 갖고 기도해야 될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선교병원이 후원만으로는 끝까지 갈 수 없거든요. 우리 헤브론병원도 이 부분을 붙잡고 계속 기도하고 있습니다.
  
15-20년 후 캄보디아인들에게 이양을 할 수 있도록 전략을 세우고 있는데  이양을 할 때는 좋은 크리스찬 리더들을 길러 세워놓아야 되고 재정적으로도 어려움이 없을 정도가 돼야 되니까요. 그런 것들이 준비가 안 되면 일대 혼란이 올 거예요. 지금까지 열심히 한 것이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는 거죠.”
 
이 선교사는 “헤브론병원이 문을 열고 본격적인 진료를 시작하며 오는 동안 수많은 일들이 있었고 그 일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기적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 중 심장병어린이 스레이 노(Srey No)를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

▲ 대양주의료선교회 초청으로 시드니를 방문한 이철 선교사 부부(2014년 9월)             © 크리스찬리뷰
 

“지금은 심장센터가 오픈되어 이곳에서도 심장수술을 하게 됐지만 그 당시에는 심장병환자들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환자들을 발견해서 후원자들과 연결시켜 한국으로 보내 수술을 받게 했어요. 이것이 저희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죠.
 
한 빈민촌에서 태어난 스레이 노에게서 심장병이 발견이 됐어요. 바로 한국으로 보냈어야했는데 후원자를 찾지 못해 6개월 정도나 늦춰졌지요. 얼마 후에 후원자와 연결이 됐고 제 아내가 스레이 노 엄마와 함께 한국으로 가 수술을 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났는데 안 나오는 거예요. 얼마 후 수술하신 선생님이 나오시더니 심장이 버티질 못했다며 죽었대요. 그런 후 화장을 해서 캄보디아로 돌아왔는데 하나님이 너무 야속했어요.
 
보내기 전부터 기도로 준비했고 보내고 나서도 중보기도 하는 분들에게 연락해서 기도를 부탁해 기도하기 시작했죠. 참 간절히 기도했어요. 이 아이를 통해서 가족과 마을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해달라고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는데 결과는 죽게 됐어요.
 
차라리 하나님께서 데려가실 거면 이곳에서 데려가시지, 사실 한국으로 간다는 것은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는 거거든요. 여기에서 수술할 수 없고 실력이 안 되니까 보내는 거거든요. 그래서 하나님의 복음이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살려달라고 온 스태프들이 기도했는데 하나님, 이게 뭡니까. 더 안타까운 사실은 이 아이의 엄마가 더 이상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태였어요. 의학적인 진단을 받았거든요.
 
몇 개월 지나서 그 아이의 엄마가 진료를 받으러 병원에 왔어요. 그런데 엄마가 너무 환하게 웃는 거예요. 철분제를 받으러 왔는데 이 엄마가 임신을 하게 된 겁니다. 아이를 잃은 후 시어머니가 그렇게 괄시하고 핍박을 했는데 하나님께서 새 생명을 허락하시고 그 가정이 회복되고 그 가정을 통해서 그 마을에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아, 그땐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셨는지 몰랐지만 이렇게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들을 행하시는구나, 지금도 그 아이를 생각할 때마다  하나님의 큰 격려가 됩니다.”
 
아아, 어머니
 
이철 선교사는 전남대 의대를 졸업한 후 광주기독병원에서 근무했다. 이후 개인병원을 운영하던 중 목포 빛과 소금교회와 여수 은파교회의 파송을  받았다. 이 선교사가 아내 양정아(50) 선교사와 함께 기빈(22), 기준(20)을 데리고 캄보디아에 온 것은 2006년 12월이다. 
 
인생의 절정. 왜 떠났는지 물었다.
 
“저는 태어날 때 아버지 얼굴을 못 봤어요. 유복자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가 교회에 출석하면서 자연스럽게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니게 되었죠. 그 후 대학 입학을 앞두고 기도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의대에 들어가서 의사가 된다면 40대까지는 돈 열심히 벌어서 그동안 의사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셨던 분들, 또 어려운 분들을 도우면서 살고 싶다는 기도를 했어요.
 
그리고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것은 대학 1학년 때였습니다. 삶의 터닝 포인트라고 할까요. 그렇다고 꼭 선교사가 되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고요. 그런데 단기선교를 다니면서 하나님께서 대학교 들어갈 때 기도했던 것들을 생각나게 해주셨어요.
 
그러면서 선교에 대해 생각하게 됐는데 하나님이 주신 은혜가 너무 큰 거예요. 이 구원의 은혜를 이렇게라도 감사하게 드리고 싶었습니다. 다만 어머니의 관계에서 어려웠었죠.”
 
▲ 외래환자를 진찰하는 이철 선교사     © 크리스찬리뷰
 

맙소사! 순간 이 선교사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다.
 
- 우십니까?
 
“에이, 울긴요.
 
이 선교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지금도 어머님께 늘 죄스러운 마음이 들어요. 지금 83세이신데 어머니께서는 내가 유복자이기 때문에 나에 대한 관심이 유별했죠. 선교사로 나가겠다고 하니까 어머님이 참 어려워하셨어요. 부모를 섬기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을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일하기 시작하니까 그 갈등이 치유가 되더라고요. 지금은 가슴에 든든한 후원자로 계시지만 마음에 늘 부담이 있어요.”
 
이 선교사는 어머니에 대한 일화를 얘기했다.
 
“몸이 아파 한국에 들어가 병원에 입원을 한 적이 있어요. 어머니에게는 걱정 하실까봐 비밀로 했죠. 그렇게 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어머니께서 낙상을 하셔서 팔목에 골절이 되셨다는 거예요.
 
제가 캄보디아에 있는 것처럼 해가지고 친구들이 있는 병원에 가셔서 진료를 받으시라고 전화를 드렸죠. 그러면서 하나님께 따졌어요. 제가 너무 힘들어서 나왔는데 어머니까지 수술하셔야 되겠습니까.
 
친구가 집으로 가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가 수술하고 입원을 하셨는데 그 병원에 제가 입원해 있었거든요. 그래서 일 주일 동안 병원에 같이 있었는데 참 행복했어요.”
 
▲ 동생에게 신장을 주기 위해 한국 출국에 앞서 원장 김우정 선교사, 부원장 이철 선교사(서 있는 사람) 그리고 행정실 직원들과 상담하는 캄보디아인 부부.     © 크리스찬리뷰
 

사실 이 선교사가 처음 생각했던 사역지는 아제르바이잔이었다.
 
“중앙아시아에 있는 나라인데 기도를 하면서 준비를 했어요. 그런데 가족들은 제가 이슬람지역에서 선교활동 하는 것을 강력히 반대했죠. 저는 가족들의 반대를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 후 온 가족이 진로를 놓고 기도하다가 호주예수전도단의 열방대학에서 선교훈련을 받게 되었죠. 그곳에서 캄보디아에서 오신 선교사를 만났고 그분을 통해 캄보디아 선교현황에 대해 듣게 되었습니다.”
 
김우정 선교사와의 첫 대면을 상상해 본다.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정하셨고 배역을 맡기셨겠지만 이 두 선교사가 만나는 장면을 바라보시면서 얼마나 보기에 좋으셨을까.
 
“당시 한국 선교사가 100여 명 남짓 있었는데 그 중에 의료선교사들이 몇 명 있었어요. 모르는 사람들이었고 서로 다른 계획들을 가지고 들어온 사람들이었죠. 여기서 김우정 선교사를 만났습니다. 그때 몇 명의 의료선교사들이 모였는데 각자 따로따로 하면 조그맣게 밖에 못하지 않느냐, 같이 하여 조금 규모있는 의료선교를 해보면 어떨까 하는 공감대가 형성이 된 거죠.”
 
이 선교사는 “지금은 설비가 잘 되어있지만 당시에는 우리가 할 수 없는 능력 밖의 환자들이 많이 왔다”며 “그런 환자들에게 간단한 약물치료만 해주고 돌려보낼 때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고 심정을 토로했다.
 
“전기 사정이 안 좋았기 때문에 수시로 진료 외에 잡일까지 해야 했어요. 비가 내리면 물이 차니까 물을 밖으로 퍼내고 뭐 행정, 관리, 수리, 경비까지 다 해야만 했어요. 그런데 환자들이 계속 몰려들었고 하나님은 이 환자들을 통해서 격려 받게 하시고 그분들의 병을 통해서 배우게 하시고 말씀을 듣게 하시니까 정말 행복했어요.”

▲ 진료 외에 병원 구석구석을 종횡무진 누비며 각종 잡일들을 돕는 이철 선교사. 사진은 간호사 스테이션에서 입원 환자들의 현황을 체크하고 있다.     © 크리스찬리뷰
 

연합선교의 모델
 
이 선교사는 연합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초창기에 4명으로 시작한 헤브론병원이 이제 제법 식구가 많이 늘어났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텐데 처음 가졌던 연합의 마음과 정신을 잘 유지, 발전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문득 에베소서 2장21-22절의 말씀이 떠올랐다. 하나님의 일은 나 혼자하게 내버려두시지 않으시고 서로 협력하게하고 연합해서 일을 이루어 가신다는 사도바울의 고백을.
 
이 선교사는 “큰 수술이 가능해지면서 어떤 의료적인 측면이 아니라 이제는 그 외의 것들을 하나님이 많이 보게 하는 것 같다”며 “그것이 호스피스사역”이라고 말했다. 이 선교사는 “이 나라에 호스피스라는 개념자체가 정립되지 않은 상태이지만 다른 선교사들을 만날 때마다 호스피스 사역에 대해 얘기를 많이 나누고 있다”고 말했다.
 
“선교사들 대부분이 젊은 세대들을 위한 사역을 하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나이가 드신 분들은 선교적 관점에서 2순위라는 느낌도 들어요. 캄보디아는 어른들을 공경하는 문화입니다. 그래서 병원에 오는 환자들이 소아과 환자보다 어른 환자들이 더 많이 오세요. 그래서 특별히 어른들에게 관심을 갖게 되는 거죠. 암 환자들이 종종 옵니다. 그렇지만 어떤 때는 우리가 그분들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의기소침이 되고 마음이 아픈데 하나님께서 그런 분들을 많이 보여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면으로 그분들을 도울 수 있을까 많이 생각하게 되죠.”
 
이 선교사는 “지금까지 그분들이 주님을 모르는 삶을 살았지만 그들의 인생이 끝나기 전에 그들에게 복음이 전해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면서 “헤브론병원이 이 사역을 감당해야 되지 않을까 기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선교사는 “무엇보다도 헤브론병원의 역사가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증거”라며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이 계속해서 머무는 헤브론병원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날씨는 35도를 오르락내리락 하는데 이 선교사는 일어나는 기자를 붙들어 세워놓고 한마디를 보탰다.
 
“사실은 여기까지 온 것이 아내의 협력과 기도 덕분입니다. 아내가 너무 귀합니다.”
  그가 처음으로 호탕하게 웃었으며 기자도 따라 웃었다.〠

*기적의 현장 ‘캄보디아 헤브론병원’을 가다 르포는 이철 부원장, 김우정 원장을 끝으로 마감하려 했으나 원고의 양도 많고 지면도 부족하여 김우정 원장 편은 부득이 다음 호에 게재하게 되었음을 알리면서, 독자 제위께 양해를 구합니다.<편집자>

글/김명동|크리스찬리뷰 편집인 
사진/권순형 크리스찬리뷰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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